비가 내린다.
늘 이 시간이면 번잡한 베이커 가에도 고요가 맴돌았다. 드세지도, 그렇다고 가늘지도 않은 빗발이었다. 적당하군. 언제부터인지 남자의 머릿속에는 적당하다는 말이 뿌리를 내렸다. 그냥, 괜찮은, 적당한. 이게 사람들이 자랑스레 늘어놓는 처세술의 일종이라면 그야말로 적당하다 할 수 있겠다. 유리 위로 비치는 남자의 모습이 평소보다 한심해 보였다.
빗물이 창 위를 훑고 내려가면 그 사이사이로 빨간 점 같은 불빛과 함께 남자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벌써 몇 개비를 태웠을지 모를 담배 덕분에 입 안은 이미 텁텁하다 못해 불씨가 남은 담뱃재로 빼곡히 들어찬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따가웠다. 잇몸이 퉁퉁 부은 게 분명했다. 내일 아침 밥상 앞에서 티를 내는 순간 잔소리가 쏟아지겠지.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문을 열자 예상치 못한 한기가 구겨진 셔츠 너머로 파고들었다. 쯧. 혀를 차도 금세 빗소리에 묻혔다. 창밖으로 손을 뻗을 것도 없이 담배 위로 빗방울이 묻는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담배가 젖으면 맛이 급격하게 변한다. 원래 맛으로 피우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별로다. 마치 독한 감기를 앓고 난 뒤 며칠 만에 담배를 물었을 때처럼.
문득 뒤를 돌아 시계를 보았다. 오후 5시 47분. 곧 비에 밀린 퇴근 차량이 몰아치겠지. 이 여유도 언제 왔냐는 듯 사라질 테다.
괜찮을까.
그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자동차가 저 빗길을 멀쩡히 달리기는 하는지 궁금했다. 물론 안에 탄 놈도 겉모습만 반짝반짝하긴 마찬가지다. 초등학교 때였나, 그보다 전이었나, 곤충 이름을 단 태풍이 오던 날을 떠올렸다. 조그만 꽃들이 끝자락에 송이송이 피어난 우산이 저 하늘 멀리 날아간 날이었다. 그 후로 비가 오는 날마다 못난이가 못난이 우산을 쓴다며 꼬마 아가씨를 놀리는 일에 맛이 들었다. 참으로 적당치 못한 꼬맹이였군.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혓바닥에 대롱대롱 매달린 말과 달리 남자는 여태 한 사람 앞에선 적당할 줄을 몰랐기에. 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도 그 여자는 종종 비 소식이 들리면 얼굴을 찌푸렸다.
아무리 놀리고 구박해도 빛이 난다. 꼬마는 빛이란 원래 그런 건지 궁금했다.
남자는 아직도 적당한 답을 구하지 못했다. 답을 구하지 않았다. 구하고 싶지 않았다.
세상을 빛과 어둠으로 양단해야 한다면 적어도 나는 빛이 아니다. 그것만은 알았다. 처음 그 결론에 도달했을 때, 남자는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겨우 본심을 알았는데 이렇게 갈라지는 건 싫다. 당연하다. 처음부터 가정으로 시작했으면서 억지를 부렸다. 지금은 어떻지.
다녀왔습니다.
갑자기 고요를 깨고 들어오는 목소리에 남자는 몸을 크게 들썩였다. 퇴근 시간이면 아이가 돌아온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우산을 가져가서 다행이란 말을 시작으로 쫑알쫑알 잔소리에 시동을 거는 아이를 보며, 남자는 웃었다. 웃긴 말 한 적 없거든요? 톡, 날아오는 화살은 남자의 가슴에서 힘없이 꺾였다. 처음부터 흐물흐물한 화살이다. 아이의 얼굴 위로 여자의 얼굴이 완벽하게 겹친다.
뭐, 네가 계속 빛날 수 있다면 어둠에 파묻혀도 좋아. 언젠가 떨어질 때 가뿐히 받아낼 수 있으리라. 남자는 등을 한 번 얻어맞고 나서야 창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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