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고에리] 폭설
* 300일 기념
…… 도쿄 전 지역에 내린 폭설 주의보로 인해 한동안 교통이 정체될 예정입니다. 오후 두 시 무렵…….
그는 나른한 표정으로 화면 속 기상 캐스터의 얼굴을 쳐다봤다. 몇 번이고 주의를 주는 모습이 참 귀찮겠다, 싶기도 하면서도 질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이미 어제저녁부터 눈이 내려 베이커 가를 오가는 차량들도 거북이처럼 기어 다니고 있었기에.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한 그가 고개를 돌리자 소파에 앉은 딸이 휴대폰만 쳐다보는 광경이 눈에 뜨였다. 어차피 오늘 저녁 약속도 없던 일이 될 게 뻔하건만 뭐 그리 초조한 표정인지.
"란, 너네 엄마한테 오늘 저녁은 못 본다고 해라."
"안 돼요!"
"안 되긴 뭐가 안 돼. 이 날씨에 나가는 건 무리야. 나간다 해도 너희 둘 다 감기 걸리는 꼴밖에 더 돼?"
"그건 그렇지만…… 엄마 생일에도, 크리스마스에도, 새해에도 못 봤잖아요."
"너희 엄마가 바쁜 걸 어떡하냐."
무심한 대답에 딸의 원망 섞인 눈길이 그에게 향했다. 아주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부모 사이에서 눈치만 보며 어떻게든 해 보려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는 건 그도 그녀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럼에도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금 거절을 표했다.
어차피 그 여자 생일, 크리스마스, 새해 모두 만남을 지속해 왔다. 란만 모르고 있을 뿐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딸에게 미안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겼다. 모종의 일로 떨어져 지내곤 있지만 이젠 말 그대로 떨어져 있기만 한 상태였고, 그와 그녀에겐 오히려 관계에 도움이 됐다. 은근히 주변 눈치를 보는 성격 상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지내면 머잖아 다시 떨어지는 일밖에 없다는 걸 그는 심각하게 잘 알고 있었다. …… 변명인가? 잘 생각하면 변명이 맞긴 하다. 자신이 없는 것도 맞고. 아, 역시 그 여자가 엮이면 생각이 복잡해진다.
"아빠, 아빠! 제 말 듣고 있어요?"
"…… 으응?"
어느새 책상 앞까지 다가온 란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생각이 너무 깊었나 보다. 그가 멍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깜박이자 란이 한숨을 쉬었다. 은근히 둔한 건 엄마를 닮았나.
"뭔데 그렇게 난리야."
"엄마가 오늘 못 만난대요."
"그럴 거라 했잖아."
"그게 아니라,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집에서 못 나간대요! 출근도 안 하기로 하셨대요."
"그래서?"
"……."
음, 이 경멸 어린 시선도 엄마를 닮았군. 란의 이마를 손끝으로 톡 밀어낸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챙겨 입었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니 전보다 더 굵은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이래서야 정말 차를 몰고 가는 것보다 걷는 편이 빠를 듯도 했다. 이렇게까지 많이 올 일인가? 외투 깃을 팡팡 소리를 내 당겨 세운 그는 란을 지나쳤다.
"너도 오늘은 집에서 푹 쉬어라. 코난 녀석이 나간다 해도 잘 말리고."
"네……. 아빠는 어딜 가시게요?"
"마작장."
란의 야유하는 목소리를 뒤로한 그는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눈 오는 날 특유의 젖은 냄새가 대기 중에 만연했다. 이대로 정말 마작장에나 가 버리면 좋을 텐데. 얼핏 든 충동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람이 너무 착한 것도 탈이라지.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말을 떠올리며 그는 새하얀 눈길 위를 마구 짓밟았다.
꽁꽁 언 손끝으로 초인종을 누르자 짧은 대답 소리와 함께 익숙한 발걸음이 느껴졌다. 누군 이렇게 개고생을 하는데 누군 따뜻한 집에서 잘도 놀고 있었나 보군. 그녀가 사는 층까지 꾸역꾸역 계단을 밟고 올라왔더니 뺨부터 시작해 팔뚝, 허벅지까지 제대로 얼어 아플 지경이었다. 눈이 오는 날은 포근하기 마련이거늘 오늘은 바람이 불어서인지 말 그대로 더럽게 추웠다. 그래도 참을 만은 했다. 이게 전부 그녀에게 1점이나마 벌기 위한 수작질이었으니까. 절로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뽀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어머, 마작장에 간다더니. 요샌 불법 마작장에 다니나 봐요?"
"시끄러워. 추우니까 빨리 비켜."
"이봐요, 왜 마음대로……!"
그는 말과 달리 그녀를 밀어내며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난방을 꽤 돌렸는지 온몸을 감싸는 온기에 힘이 쭉 풀렸다. 어깨에 남은 눈을 툭툭 털어내고 있자니 그녀가 짜증을 내며 그를 지나쳤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상황이 꽤 우습게 느껴졌다.
"눈 정도는 털고 들어와야 하는 거 아닌가."
"말이 많다."
"자기소개는 필요 없네요."
이대론 말다툼이 끝이 없지 싶어 여태 손에 쥐고 있던 봉투를 내려놓았다. 그제야 그녀의 시선도 아래로 꽂혔다. 이게 뭐냐는 듯 의문이 담긴 그녀의 얼굴을 흘끔 본 그는 구두와 외투를 벗었다. 제 몸에서 차가운 공기가 퍼져나가 걸어 나가는 냉장고가 된 기분이었다.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낸다면 타박이 들려올 터. 다시 봉투를 집어든 그는 껄렁한 발걸음으로 부엌을 향해 걸었다.
"어차피 냉장고 열어도 아~무것도 없을 거 아냐. 집으로 오라 한들 이런 날씨에 직접 움직일 인물도 아니시고."
"…… 흥."
"밥은 있지?"
"네. 근데 대체 뭐길래 그래요?"
"카레."
"카레……?"
"꼬치꼬치 캐묻지 말고 들어가서 잠이나 자. 나 집중해야 돼."
할 말이 남았는지 입술만 삐죽거리는 그녀를 보며 그는 혀를 찼다. 여왕이란 별명이 붙을 만큼 성실하고 꼼꼼하며. 주도면밀한 모습까지 보이는 그녀는 가끔 무척이나 게을러졌다. 가끔이 아니라 극히 드문 일이라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매일매일 열심히 살기만 하니 한 번씩 퓨즈가 나가는 것이다. 하루에 몇 번씩 퓨즈가 나가기도 하는 그로서는 완전히 이해하긴 어려운 일이었다. 그저 게을러 상태에 빠진 그녀를 보고 싶어서 무작정 여기까지 왔다. 그게 전부다.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완벽한 모습만 보이는 그녀의 허점이야말로 그가 가장 사랑하는 부분이다. 그나 그녀 자신이 긍정하든 부정하든.
그녀에게 카레를 한 그릇 가득 먹이고, 잠시 어른의 놀이를 즐기고, 목욕과 기타 잡스러운 일까지 마치고 난 후에야 그는 몸이 완전히 데워졌음을 느꼈다. 그녀도 아직 기운이 없는지 침대 위에 축 늘어져선 눈동자만 굴려 그를 쳐다봤다. 그는 창문을 살짝 열고 담배 필터를 쭉 빨아 당겼다. 몸이 데워진 것을 확실히 느끼고 싶어서였다.
"얄미워요."
"응?"
"항상 나만 이렇게 지쳐 쓰러지잖아요.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다니고요."
"아무렇지도 않긴 무슨."
"그럼요?"
"여기 도착했을 때부터, 아니다. 어젯밤부터 피곤했어. 아침 내내 란이 닦달해서 눈 치웠더니 약속 깨졌다고 화를 내잖아."
"당신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구요?"
"…… 아닐걸?"
그럼 뭐 하러 왔어요? 그는 다 쉰 목소리로 앙칼진 소리를 내는 암고양이를 향해 연기를 내뿜었다.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고 손으로 연기를 쫓았다. 그는 씩 웃었다. 보고 싶어서 왔지. 할 말을 잃은 그녀가 고개를 돌렸고, 그는 담배를 재떨이에 던지곤 상체를 숙였다. 오늘 나눈 입맞춤 중 가장 달콤한 맛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