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雜錄

[코고에리] 밀담

毛利 2022. 10. 31. 12:21

 

 

 

 

  코고로는 이맛살을 쥐어짰다. 하도 찌푸려 주름이 생긴 미간부터 시작해 두통마저 퍼지는 듯했다. 얘는 왜 그 시간까지 잠을 안 자고. 식탁 앞에 털썩 앉자 란이 뒤를 돌아봤다. 꼬맹이는 이미 먹고 나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어째서 이런 날에만 보이지 않는 건지.

 

  "그래서 그 여자가 누구냐구요."

  "시끄러워. 대체 몇 번을 묻는 거야?"

  "아빠가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안 물어요?!"

  "신경 꺼!"

 

  누굴 닮았는지 집요하다. 그러니까 딸인 거겠지. 대체 그를 닮은 곳은 어디인지, 코고로는 잠시 생각했다. 답을 듣기 전까지 절대 물러서지 않을 저 표정을 당장 며칠 전에도 실컷 보고 온 차였다. 코고로가 마땅한 대답을 주지 않고 밥만 입에 밀어 넣자 란이 발끝으로 코고로의 정강이를 툭 걷어찼다.

 

  "누구냐고 물어봤잖아요. 아빠."

  "……."

  "마음에 걸리는 게 없으면 바로 대답할 수 있을 거 아녜요. 친구라든가, 의뢰인이라든가, 그냥 아는 사람이라든가……. 하긴 그런 사이에 보고 싶다느니 귀엽다느니 하진 않겠네요. 역시 애인이잖아!"

  "그래. 애인이다. 됐냐? 속이 뻥 뚫렸냐?"

  "…… 최악이야!"

 

  코고로는 홀로 남아 식사를 계속했다. 란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전화 한 통 잘못 받은 일 가지고 격노하는 여자가 기다리고 있지 않나. 음, 쫌생이 같은 면도 그녀를 쏙 빼닮은 것 같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밥만 맛있으면 됐지. 어쩐지 방금까지 입에 맞았던 식사가 싱겁게 느껴졌다.

 

 

 

 

  사방이 새카맣게 물든 밤, 사무소 문을 닫고 나니 밀린 한숨이 쏟아졌다. 이상하게 긴 하루였다. 의뢰인이 없어서였을지도 모르고, 딱히 조사할 일이 없어서였을지도 모르고, 란과 꼬맹이가 죄다 놀러 나가서였을지도 모르고, 그 전부가 이유일 수도 있다. 사실은 외로워서겠지. 코고로는 입에 담배를 물었다. 틱틱대는 소리가 지나가면 담배 끝이 빨갛게 물들어 천천히 타들어갔다.

 

  은밀한 연락을 주고받은 지 오늘로 여드레, 슬슬 저쪽에서 먼저 연락을 할 때가 됐다. 상대의 일정을 모두 파악하고 있진 않기에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 매일 이런 기분으로 기다렸나?

 

  적어도 지금의 자신보단 덜 착잡했으리라. 들킨 일에 대해 혼날 준비도 해야 하고, 매일 모든 힘을 짜내 했던 말도 해야 한다. 물론 조금씩 수월해지는 기분은 들었지만. 아차, 재떨이. 재떨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책상 위를 손으로 훑었다.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동안 손에 닿는 자료들을 죄다 뒤적거렸더니 책상 위가 마작판과 다를 바 없었다. 신문지 밑에 숨어 있던 재떨이 위에 가느다란 막대를 툭툭 내리쳤다.

 

  서너 대를 더 피우고 나서야 전화벨이 울렸다. 코고로는 일부러 몇 번 숨을 고르고 나서 착신 버튼을 눌렀다. 휴대전화 대신 사무실 전화기 스피커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위층도 비어 있는 오늘만 즐길 수 있는 유흥이다. 고요한 사무실 안에 또렷하고 침착한, 그러나 코고로만 알 수 있을 만큼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여보세요? 여보?"

  "응. 에리."

  "전화를 받았으면 먼저 말을 해야죠."

  "아, 미안 미안."

  "하나도 안 미안한 목소리잖아!"

 

  어김없이 미간이 구겨졌다. 코고로는 느긋한 움직임으로 의자에 앉아 창밖을 향해 몸을 돌렸다. 오늘 베이커 가의 날씨는 아주 맑아서 드문드문 하늘의 별도 보였다. 길가를 지나가는 차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있다는 건가.

 

  "럭키."

  "네?!"

  "…… 응?"

  "뭐가 럭키, 예요??"

  "에, 화가 난 목소리마저 귀여운 아내를 둬서 운이 좋다는 거지."

 

  어색한 웃음과 함께 둘러대자 역시나 짜증 어린 목소리가 돌아왔다. 잔소리는 한 번에 듣는 게 낫겠지? 삼 초 정도 고민한 뒤 아내에게 아침의 일을 전했다. 금세 살랑살랑 흔들리던 말꼬리가 자취를 감추고 사무실을 채웠다. 들키고 싶어서 들킨 것도 아니고,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혼나고 있자니 기분이 팍 상했다. 코고로는 새 담배에 불을 붙이며 투덜거렸다.

 

  "어쩔 수 없잖아? 란이 언제 움직이는지 알면 내가 탐정이 됐겠어? 일단 너랑 통화한 걸 들키지 않았으니 잘됐군 잘됐어 아니냐?"

  "하아……. 방금까지 내가 한 말, 하나도 안 들었죠?"

  "어떻게 알았대. 이럴 때만 눈치가 귀신같아. 란도 그러더니."

  "란은 또 왜 걸고넘어져요?"

  "단번에 애인이냐고 추궁하는 게 널 꼭 닮았더라."

 

  긴 침묵이 이어졌다. 비로소 이 상황이 즐겁게 느껴진다. 딸과 닮았다는 점이 만족스러운지, 애인이라는 말이 기쁜 건지 추론하는 일이 즐겁지 않을 리가. 답이 명확하면 더 즐거운 법이다. 삐딱하게 몸을 튼 코고로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슬슬 시간이 아까운데."

  "…… 네?"

  "잠들기 전의 짧은 밀회야. 매일 꽉꽉 채우다 허비하고 있자니 아깝게 느껴지는군."

  "그건…… 으응."

  "그래. 착하다. 이제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봐."

 

  손가락을 까딱이니 담뱃재가 아지랑이처럼 흩어져 바닥에 떨어졌다. 이럴 거면 뭐하러 아까 그 난리를 쳤는지. 쯧, 몇 시간을 기다린 것도 아니거늘. 기다리는 게 일인 사람이 그랬다 생각하니 제법 민망했다. 만들고자 의식하면 좀처럼 굳어지지 않는 주제에 생각조차 하지 않은 일은 순식간에 딱딱해지는 점이 습관의 무서운 부분이다.

 

  검은 하늘 위에서 점멸하는 불빛을 쫓으며 아내가 조잘거리는 이야기를 들었다. 꼼꼼한 여자라 중요한 부분은 쏙쏙 빼놓고 말해도 그럭저럭 재미가 있었다. 서로 일 이야기를 할 곳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렇게라도 청소를 해야 구멍이 막히지 않는다. 아내의 구멍은 코고로의 것보다 더 꽉 막힌 편이라 시시콜콜하게까지 느껴졌다. 사실, 코고로는 그 이야기보다 아내의 목소리에 관심이 많았다. 음의 고저, 웃을 때면 부드러워지는 어조, 기억을 되짚을 때면 줄어드는 크기 같은 것들.

 

  "…… 그래서, 오늘은 아주 힘들었어요."

  "고생했네. 역시 여왕님은 달라. 이쪽은 하루 종일 파리 손님만 받았는데."

  "불러다 서류 정리라도 시킬 걸 그랬나요?"

  "그건 사양할게."

 

  십여 년 전과 다를 바 없이 웃는 소리가 신기하다. 아내도 그렇게 느끼는 점이 있을까. …… 칠칠맞지 못한 주제에 귀엽잖아.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있던 감정이 깨어나기 시작하니 어색하기까지 했다.

 

  얼마나 더 떠들었을까, 코고로는 헛기침을 했다. 아내의 목소리에 졸음이 배기 시작해서였다. 이 여자는 이런 점만 성실하다. 늘 비슷한 시간에 잠들고 늘 같은 시간에 일어난다. 사람이 그렇게 틀에 맞춰 움직이니 탈이 나는 것이다. 아내가 이름을 부르자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졸리지?"

  "조금?"

  "무리하지 말고 자. 내일 밤에 또 전화할 거잖아."

  "그렇지만 내일 밤은 한참 멀었잖아요……."

  "나보다 훨씬 바쁘게 지내면서 멀긴 뭐가 멀어."

  "또 그렇게 말하지. …… 내일도 내가 먼저 걸어요?"

  "으흠……. 아니. 내가 걸지."

  "좋아."

 

  다시금 코고로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그러나 이번엔 입꼬리도 함께였다. 의식이 희미할 때 말고도 이렇게 달라붙으면 좋을 텐데. 반대로 코고로가 늘 살갑길 바란다고 하면 불가능함은 마찬가지라 금방 그 생각을 접었다. 사람은 타고난 성질을 너무 벗어나면 안 된다. 아무튼 안 되는 거다.

 

  "…… 에리."

  "네에."

  "큼, 보고 싶어."

  "오늘은 조금 늦었네요? 잘했어요. 여보."

  "갑자기 애 취급이야?"

  "어떨까요. 전 욕심쟁이라 안 알려 줄 거예요."

  "알았어. 알았다고."

  "들을 준비됐어요."

 

  코고로는 한 번 더 기침했다. 조금 수월해지는 것 같단 말은 취소다. 완전 철회. 전격 철회. 열 손가락 끝을 서로 맞대 착착 부딪힌다.

 

  "사랑해."

  "…… 사랑해요."

 

 

 

 

  새빨갛게 얼굴을 붉힌 코고로의 등 뒤로 살짝 열려 있던 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옅게 남은 온기도 코고로가 올라갈 즈음엔 사라질 테고, 다음 날 왜인지 살가워진 란의 태도도 이해할 수 없겠지. 정작 코고로는 달아오른 볼을 식히느라 바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