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고에리] 2022 생일 기념
정말 이대로 가실 거예요?
아쉬움이 가득하던 란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요즘 들어 차가워진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평소보다 느렸다. 지금이라도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헛된 마음이 문제였다.
매년 그래 왔듯 올해 생일도 다 같이 저녁 식사를 할 예정이었다. 평소 하던 가족 외식보다 조금 더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가장 마음에 드는 요리를 주문하고, 시답잖은 말다툼을 하며 곤혹스러워하는 딸의 얼굴을 보리라 생각했다. …… 어쩌면 오늘만은 그가 순순히 고개를 숙여 오랜만에 부부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스스로 부정하려 해도 일주일 전부터 속옷부터 고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자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마저도 오늘 아침 전부 갈아치웠다. 한껏 세팅한 머리는 여태 잔머리 한 올 흘러내리지 않고 빳빳하게 고정된 채였다.
그랬는데.
정작 그 남자는 오늘 식사 자리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사건 현장에 불려갔다나 뭐라나. 쭈뼛거리며 눈치를 보는 란의 얼굴을 보니 거짓말이 아닌 듯했다. 예전부터 그런 남자였다. 제겐 무례한 짓이란 무례한 짓은 다 골라다 하는 주제에 그 남자의 머릿속엔 부정이나 불의 같은 게 없어 사건만 있다 치면 얼굴을 들이밀고 보는 남자였다.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오늘만은 자신을 우선해주길 바랐다. 이기적이면 뭐 어떤가. 남편에게 이 정도는 매달려도 되는 거 아닌가? 그럴 거면 뭐하러 경찰은 그만둔 거래. 그녀는 마음에 없는 말까지 중얼거리며 차가운 밤거리를 걸었다. …… 됐다. 덕분에 란과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지 않나. 선물로 받은 팔찌는 내일 출근할 때 착용할 것이다. 그렇다. 즐거운 생일이었다. 그녀를 마주치는 모든 사람이 따뜻한 인사의 말을 건넸다. 그 남자는 알 게 뭔가 싶다.
거짓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만큼 바람이 차다.
엘리베이터가 멈춰섰다. 정말 집까지 오고 말았다. 생일이 끝나간다. 이쯤 되니 그냥 란과 함께 갈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어차피 그 사람은 내일이나 되어야 들어올 텐데 오랜만에 모녀가 한 이불을 덮고 잠들 수 있었겠지. 그 모습을 상상하니 괜히 눈가가 뜨거워졌다. 딸에게 투정을 부리는 엄마라니, 엄마 실격이야.
집에 가까워지니 오히려 발걸음이 빨라졌다. 시선은 줄곧 구두코에 꽂힌 채였다. 우울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기 마련이다. 빨리 들어가서 따뜻한 물에 목욕하고, 와인도 한 잔 마시고, 제일 좋아하는 향수를 뿌리고 자야지. 조금 풀리던 표정이 그 향수마저 그가 사준 것이라는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다시 망가진다. 눈썹이 축 처져 팔자 모양이 됐다.
"왜 그나마 볼만한 얼굴도 숨기고 다녀?"
"……."
"뭐야. 귀신 봤냐?"
베이지색 정장 차림의 남자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남편이다. 급하게 왔는지 넥타이는 비뚤어졌고,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손은 깨끗했지만 묘하게 비릿한 냄새가 났다. 현장에서 바로 여기까지 온 모양이다. 아마 란이 연락을 했겠지.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붙들었다.
"되게 멋 없네."
"뭐?!"
"꼴이 흉하다구요. 하긴, 약속도 못 지키는 남자가 멋있을 리가 없네요. 그 꽃은 또 뭐예요? 가지고 올 거면 좀 똑바로 들고 있지."
"보자마자 한다는 말이, 아차. …… 좀 시들었네."
"비켜요."
쌀쌀맞은 그녀의 태도에 그가 뭐라 뭐라 지껄이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늘 이런 식이다. 필요할 땐 자리에 없으면서 뒤늦게 만회하러 와선 그마저도 제대로 하는 법이 없다. 지금은 당신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고 싶지 않아. 오히려 투정을 부리고 예쁨 받고 싶은 건 나라구. 절대 지금이라도 와서 좋은 게 아니니까. 집에 들이는 게 용서의 뜻은 아니니까! 그녀는 그를 옆으로 밀치고 문을 열었다. 익숙한 향기가 난다. …… 오늘 밤, 다른 향기가 섞이겠지. 그건 또 며칠이나 갈까. 그녀는 마른 입술을 축인 뒤 문고리를 잡은 채 그를 돌아봤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성의를 봐서……."
"샤워하기 전엔 포옹도 뽀뽀도 안 돼요."
"그건 또 무슨,"
"하나하나 말대꾸하는 것도 금지. 그건 샤워하고 나서도 금지야."
"에리."
"뭐 잊어버린 거 없어요?"
새침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고민에 빠진 얼굴이 보였다. 이렇게 멍청한데 어떻게 경찰 노릇을 하고 탐정 노릇을 하는 건지. 입술을 삐죽거리자 그의 표정이 한층 우스워진다. 그녀에게 있어 영겁과도 같은 찰나가 지나고 나서야 그가 눈을 크게 뜨며 웃었다.
"생일 축하한다. 에리."
"…… 흥."
그녀는 그제야 문고리를 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구두를 벗는 사이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와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손이 그녀의 등 위로 내려앉았다가, 금세 떨어진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으리라. 안 된다고 했죠? 짐짓 엄하게 타이르는 목소리에 웃음이 섞인다. 알았다며 투덜거리는 목소리엔 서러움이 섞여 있었다. 그가 한 예쁜 짓은 그녀가 오늘 저녁 겪은 외로움에 비하면 사막의 모래 한 알 수준이다. 잔뜩 혼내고, 예쁨도 받고, 투정도 부려야지. 응. 역시 생일은 좋네. 그녀는 손으로 입가의 미소를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