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시나리오의 스포일러가 포함됩니다.
정신이 멍합니다. 이상하게도 주변이 소란스럽습니다.
창밖에서 흘러들어오는 환한 빛이 어째서인가 지나치게 낯섭니다.
아까까지만 해도 짙은 밤이었던 것 같은데, 시간이 이렇게 빠르게 흘렀을 줄은 몰랐습니다.
네, 상대의 얼굴도 모르고 이름과 그 상대 집안의 명성만 익히 들어 알 뿐인 마음 없는 정략 결혼 말입니다.
이 지진한 시대의 결혼은 대체로 그런 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놈의 가문의 명성. 그걸 유지하기 위해 감정을 팔아서…
그러나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저택의 모든 이들은 결혼식을 준비하느라 바쁩니다.
당신을 위한 예복과 함께 오페라 하우스를 통째로 빌려 이 결혼을 만인이 축하한다고……
5년 전 이 무렵, 그 히스 꽃밭에서 당신은 에바와 이별했습니다.
이별의 이유는 명백히 당신을 위해 결혼을 막으려 했던 그의 행동 때문이었을 텐데요.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요? 난데없이 정략 결혼이라뇨? 없던 일이 된 게 아니었단 말인가요?
의문을 추스르기도 전, 사용인이 들어와 기쁜 낯으로 당신에게 의복을 건넵니다.
사용인: 출발 준비를 도와드리겠습니다, 도련님.
오늘 저녁 오페라 하우스로 이동할 다른 준비가 모두 끝났답니다.
Richard:…….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도 모르겠는데, 상대가 뜬금없이 한다는 말은 더 이해가 가지 않아 얼굴을 찌푸리고 옷을 받아들었다. 뭐, 상관 없나. 탓이라면 아직도 인형놀이가 즐거운 분들 탓이겠거니 하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리처드는 일단 받아든 예복을 입고서 자리에 앉습니다.
사용인이 다가와 당신의 머리를 빗으로 쓸어주고 옷매무새를 정돈합니다.
이 모든 일말의 정돈된 손길을 받다보면 묘한 인상을 받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요, 린튼 가와의 결혼식 전 에바가 당신에게 건넨 돌봄과 동일합니다.
하지만 고개를 들면 그곳에 에바는 없습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걸까요.
Richard:(내가 그 이상한 주문을 걸었던가. 그럴 리가 없다. 아직도 본인이 만들어 낸 결과물을 무로 만들지 말아 달라던 목소리가 온종일 귓가를 맴도는데, 그럴 리가 없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다.) …… 오늘 날짜가 어떻게 되지?
사용인이 대답해 주는 날짜는 어제로부터 5년 전, 린튼 가와 결혼을 하던 날짜와 동일합니다.
사용인: 도련님도 참, 너무 들떠서 날짜도 잠깐 잊으신 건가요?
Richard:이게 들뜬 얼굴로 보이나. 하아……. …… 에바는?
사용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어디서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는 태도입니다.
Richard:그…… 됐어. 더 준비할 게 없으면 이만 가지. 피곤해.
사용인: 비록 지금까지 이름이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왕가와 직결되어 있는 거대한 가문이니 분명 이 결혼이 성공한다면 이 저택의 위상이 엄청나질 거라 들었답니다. 그러니 도련님도 적극적으로 나가 보세요. (머리를 다듬는 손길을 끝으로 네게서 한 걸음 물러난다. 마냥 생글생글 웃는 낯이다.)
Richard:다들 좋아하시겠군. (다 늙어빠진 아들이 뭐가 잘났다고 그런 곳에 들이밀 작정인지 알 수 없어 표정이 더 구겨졌다. 거울을 슬쩍 보면 겉으론 멀끔하게 보이는 남자가 있어 헛웃음을 지었다. 그럼 뭘 해. 사용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저 모든 게 빨리 끝나길 바랐다.)
1층으로 내려가자 사용인들이 짐을 챙겨 당신을 저택 입구에 대기한 마차로 데려갑니다.
마차는 오페라 하우스로 향할 준비를 끝마쳤습니다.
지금부터 당신이 향할 샌타 바버라 오페라 하우스는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입니다.
오페라 하우스라기보단 거대한 궁전에 가깝다 했죠. 1층에 준비된 거대한 홀에서는 연말마다 가장 성대한 파티가 열린다 들었습니다.
사용인B: ...... 그리고, 성대한 파티가 열리고 왕족과 고위 귀족들이 모이는 장소에서 도련님의 결혼 축하 파티와 공연, 나아가 식까지 진행될 거라고 하네요. 전해들은 일정은 이 정도입니다.
Richard:알겠네. 필요할 때만 불러주면 고맙겠군. 괜히 실수해서 인상을 망칠 필요는 없잖나. (그럴듯한 핑계라고 생각하며 대답하곤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눈을 감았다. 상대도 궁금하지 않고, 그 이후의 일도 궁금하지 않다.)
갑작스레 다시금 들이닥친 정략 결혼도 그렇고, 결혼 축하 파티? 공연? …...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결혼식?
그러나 시간은 당신의 의지의 무관하게 흘러갈 따름입니다.
오전에 출발한 마차는 오후가 지나 저녁에 가까워지고 나서야 거대한 오페라 하우스의 외곽을 마주합니다.
오페라 하우스는 해안가의 절벽 근처에 자리해 있습니다. 거대한 크기로 도시 외곽에 위치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바글댑니다.
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절벽 위에는 들꽃이 피어 있습니다. 절벽 아래로 내려가면 산책로로 인기가 많은 해안가가 존재합니다.
Richard:(저녁 즈음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창밖으로 보이는 해안으로 건조한 눈길만 주다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무슨 일정이 있지?
사용인B: 일단 들어가시면 잠시 후에 웰컴 파티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무려 왕실에서도 직접 사람이 와 축하한다고 하더군요.
Richard:쉴 시간 정도는 주면 좋겠는데 말이야. 이렇게 투덜거려도 별 수 없다는 건 알지만, 보통 이렇게 장거리 이동을 하면 배려 정도는 해 준다고.
사용인B: 아마 웰컴 파티는 그리 길지 않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마차에서 먼저 내려 널 기다린다.) 그럼 가실까요?
Richard:말은 그렇지. (뒤따라 마차에서 내려 옷깃을 털었다. 좋게 좋게 가야 빨리 끝난다. 요 몇 년 사이의 교훈이다.)
당신이 마차에서 내리고 오페라 하우스의 입구로 향하자, 떠들며 입구 안으로 들어가던 사람들이 잠시 행동을 멈춥니다.
이미 도착해 있는 수많은 마차와 사람들이 보입니다.
짐을 들고 당신을 따라오던 시종들도 따라 걸음을 늦추었습니다.
그들의 시선은 당신을 향했다가, 아까까지의 소란스러움을 내려놓은 채 입구로 들어갑니다. 결혼의 주인공답게 주목을 받고 있는 걸까요?
Richard:(이런 관심 필요 없는데. 한숨을 쉬고 시선을 땅에 처박은 채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간다.)
그곳에는 에바가 당신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습니다.
그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면, 마지막 기억 속에서와 달라진 게 없습니다.
다른 점을 꼽으라면 조금 더 깨끗해졌다는 것?
마지막으로 조우했을 때 너덜하게 자리했던 상처가 조금도 없다는 것.
남루하지도, 슬퍼 보이지도 않는 당당한 외관은 미미한 오만함이 깃든 영락없는 대귀족의 태도입니다.
가꾸어진 머릿결은 단정하며 입은 옷에서는 귀태가 흐릅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 번에 사로잡은 모양새가 낯설지 몰라도 그는 에바입니다.
당신에게 고정된 저 두 눈이 알립니다. 당신 이외 그 무엇에도 관심을 주지 않는 눈이.
Richard:……. (언제나의 환각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기억 속에서 몇 번이고 그렸던 옷을 입고 있지만, 지나치게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게 현실인지 제대로 판단하기도 전에 발이 움직였다. 네 앞으로 다가가 아무런 말도 없이 두 눈동자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Eva Kadan:
SAN Roll
기준치: |
50/25/10 |
굴림: |
74 |
판정결과: |
실패 |
반갑습니다. 제가 카단 가문의 에바라고 해요. 처음 뵙겠습니다. (그 시선을 가만히 마주보다 가볍게 머리를 숙여 인사한다.)
Richard:…… 무어 가의 리처드요. 반갑군. (처음, 그래. 처음인가. 그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만일 진실이라면 차라리 잘 되었다. 천천히 목례한 뒤 악수를 청하듯 손을 뻗는다.)
Eva Kadan:비록 정략으로 맺어진 인연이지만 부부가 될 몸이니 결혼식까지의 사흘 간 좋은 모습만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살짝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네 손을 부드럽게 잡아 악수를 나눈다.) 첫 인상은 나쁘지 않았을까 모르겠군요.
Richard:별 말씀을. 오히려 정략이 아닌 경우가 드물지. 그 중에서도 진실한 이들이 만나 나 또한 그대…… 를 만나게 된 게 아니겠소. (차마 웃을 수 없어 무뚝뚝한 표정으로 손을 꽉 쥐었다 놓는다.) 걱정 않으셔도 될 듯하오.
Eva Kadan:상냥한 분이시네요. (짧게 대꾸하고 주위를 눈으로 훑어보더니, 시끄럽지 않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먼 길 오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괜찮으시다면 결혼식 전까지의 자세한 일정을 알려드려도 될까요?
Richard:하루를 꼬박 달려왔으니……. (어째서일까. 네 앞에선 잘만 움직이던 혓바닥이 고장이 난 것처럼 멈추느라 바쁘다. 아직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종잡을 수 없어 고개만 끄덕이며 뒤를 따른다.)
Eva Kadan:대략적인 일정은 들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결혼식은 3일 뒤....... 모레에 결혼을 축하하는 마지막 파티가 꽤 큰 규모로 열린다더군요. (노래하듯 한점 막힘 없이 말을 잇는 제 얼굴에는 조금의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내일은 결혼식을 축하하러 와주신 왕실 분들과 저희를 위한 오페라 공연이 예정된 상태입니다. 리처드 공께서는, 오페라는 좋아하시는지요.
Richard:(파티 같은 건 많아도 전후로 한 번씩만 하면 좋을 텐데. 어림도 없는 생각을 하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 아, 무래도 내용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싶은데. 지루한 건 못 견디는 편이라 말이오. (민망한 듯 잠시 시선을 피했다 다시 네 얼굴을 바라본다. 이게 전부 가짜라면 나는 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게 되는 게 아닐런지. 피곤한 눈가를 꾹꾹 누르다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습니까. 에바 양.
Eva Kadan:걱정 마세요. 오페라를 기대해도 좋을 거라고 장담할게요. 일정이 빡빡한 만큼 불편함이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네 질문에 멈칫 널 뒤돌아보며 고개를 기울인다.) ...... 그건, ...... 어떤 의미죠? 스쳐 지나가다 한 번은 봤을지도 모르겠지만....... 저로서는 기억에 없는데. 리처드 공처럼 멋진 분을 뵈었다면 제가 잊었을 리가 없죠. 후후...... 안 그래요?
Richard:뭐든 기대하지 않는 게 가장 기뻐할 수 있는 길이라오. (가장 실망하지 않을 수도 있고. (시선이 마주치자 힘없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말씀대로요. 아주 오래 전에 만났었지. 어쩌면 엇갈렸기에 나만 기억하고 있는 걸지도요. 괘념치 마시오.
Eva Kadan:어쩐지 쑥스럽네요....... 저를 기억해 주신다니.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작게 소리를 내어 웃다, 저를 부르는 소리에 난처한 낯을 했다.) 아, 죄송해요. 저를 찾으시는 것 같아서...... 이만 실례할게요. 이따 웰컴 파티에 오실 거죠? 그때 더 이야기해요. 즐거웠어요, 그럼.......
에바는 당신에게 인사를 하고서 먼저 친척들이 있는 곳으로 사라집니다.
리처드는 오페라 하우스 내부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Richard:(멀어지는 등을 붙들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으나, 두 발은 바닥에 말뚝처럼 박혀 있었다. 한참 눈만 껌벅거리다 이 이상 볼일도 없기에 하우스로 들어간다.)
리처드는 오페라 하우스로 들어섭니다. 지도가 공개됩니다.
들어서기 무섭게 궁전이라는 명색이 무색하지 않게끔 휘황찬란한 샹들리에와 기둥, 황금 장식이 당신을 반깁니다.
경쾌한 음악 소리가 홀 내부에 퍼집니다. 삼삼 오오 모인 귀족들이 곳곳에 포진된 상태입니다.
에바는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옆에 서 있습니다. 몰려든 사람들을 보아 받고 있는 관심이 지대한 모양입니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당신을 알아본 몇몇 사람들이 지나가며 인사합니다. 모르는 얼굴이 아는 체를 해오네요.
?: 아, 리처드! 나 기억 나나? 사돈의 팔촌에 오촌의 친구의 아버지, 바튼 윌슨 말일세! 자네의 1세 생일 잔치에서 봤었는데, 이렇게 많이 컸군!
Richard:…… (사돈의 팔촌에 오촌의 친구의 아버지면 꽤나 가까운 사이군. 곰곰이 되새기다 고개를 꾸벅인다.) 이제 거기에 마흔 정도를 곱해야 지금 나이가 됩니다. 윌슨 경.
??: 결혼 축하드려요, 리처드 씨. 저는 일찍이 카단 가문과 잘 될 거라 굳게 믿고 있었답니다!
Richard:감사합니다. 분수에 맞지 않다 느껴질 만큼 좋은 분을 아내로 들이는 것 같아 얼떨떨하군요. (다시 꾸벅인다…….)
??: 소문으로는 그 카단 가의 에바 분도 굉장한 숙녀분이시라면서요. 혼담이 몇 개나 들어왔는데도 구태여 리처드 씨한테 먼저 정략혼을 청하다니 말이죠.
Richard:…… 그렇습니까. 더더욱 의중을 모르겠군요. 이쪽으로선 그저 감사할 수밖에요.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사랑받고 자란 아가씨라는 게 느껴지던데…….
??: 왕가 쪽과도 연결되어 있으니, 그럴 만도 하죠. 두 분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회자될 한 쌍의 부부로 남을 거예요, 분명.
카단의 가문이 그 정도로 유명한, 왕가와 연결된 집안이었던가요.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아무리 생각해도.......
대화를 적당히 끝낸 리처드는 1층 조사가 가능합니다.
[입구], [휴게실 입구], [식당 입구], [홀], [계단]을 조사할 수 있습니다.
Richard:피곤하군……. (일단 홀부터 쭉 둘러본다.)
어마어마하게 크고 화려한 홀입니다. 바로 앞에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과 1층 콘서트 홀 입구가 위치해 있습니다.
과연, 파티장으로 쓰일 만큼의 크기네요. 모든 장식이 황금색으로 빛납니다. 웰컴 파티를 준비하는 사용인들이 군데군데 자리한 상태입니다.
Richard:
관찰력
기준치: |
65/32/13 |
굴림: |
63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이곳저곳에 명화가 많이 그려져 있음을 깨닫습니다. 대부분이 신화와 연관된 것 같다는 사실도요.
천장에 그려진 그림을 보면, 연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자신의 세계로 인도하는 신의 손길이 아름답게 묘사됐음을 깨닫습니다.
Richard:(안타깝게도 예술에 큰 흥미가 없다. 그냥 지금은 그 무엇에도 흥미가 없다. 단 하나를 제외하고. 뒤를 돌아 들어온 입구를 살폈다.)
거대한 아치문의 양 기둥은 황금색을 띠고 있습니다.
Richard:
지능
기준치: |
65/32/13 |
굴림: |
34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리처드는 들어오는 손님들이 최소 젠트리 계급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마저도 일부이며, 대부분이 명망 있는 귀족들입니다.
이름을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귀족들이 당신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이곳에 자리했습니다.
Richard:(전에 본 적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나? 사돈의 팔촌의 오촌의 친구의 아버지 같은 사람 말고.)
Richard:(가족들 말고. 가령 린튼 가의 죽은 눈 패밀리라든지. 지금 생각해도 기분이 나쁘지만 여기에 있다면 그나마 상황 판단이 될 것 같다…….)
Richard:(다행인지 아닌지…… 더더욱 모르겠다. 그 참극과 끼워맞추면 네가 여기 실존하는 게 불가능하지 않나. 식당 쪽으로 휘적휘적 걸어가 안으로 고개를 들이민다.)
오페라 하우스에서 지내는 동안 식사는 이곳에서 해결하게 될 것입니다. 특별한 점은 보이지 않네요.
발걸음을 돌리는 찰나, 멀리 있던 에바와 눈이 마주칩니다.
에바는 리처드를 보고 조용히 웃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다른 이들과의 대화를 이어갑니다.
Richard:……. (역시 세상이 이번엔 나를 골탕먹이려는 걸까. 눈앞에 네 웃는 얼굴이 아른거려 일부러 홀을 가로질러 휴게실로 들어갔다.)
이곳 오페라 하우스는 VIP 게스트를 위한 숙소를 따로 마련해 두었는데, 숙소로 이어지는 계단이 휴게실 안에 자리해 있습니다.
휴게실 입구로 들어서면 여전히 사람이 몇 이미 자리해있는 휴게실을 마주합니다. 숙소로 향하는 계단이 놓여 있습니다.
숙소로 올라가 짐을 풀고 잠시 휴식을 취함이 가능합니다.
Richard:(그 외에 특별히 눈에 띄는 건 없나?)
Richard:
관찰력
기준치: |
65/32/13 |
굴림: |
22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휴게실에 놓인 테이블 위에 놓인 책을 발견합니다. 아마 에바네 가문에서 가져온 것 같은데… 살짝 봐도 괜찮지 않을까요?
Richard:(어느 가문에서 가져왔든 휴게실에 방치할 정도면 상관 없겠지. 적당히 아무 자리에 앉아 제목부터 훑는다.)
내용을 들추니, 마찬가지로 빽빽하게 들어선 글자들에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Richard:
SAN Roll
기준치: |
59/29/11 |
굴림: |
16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어딘가에서 지독한 시선이 느껴지며 미미한 오한이 듭니다.
정신을 다잡고 글자를 읽으면 몇 가지 단어를 건져냅니다.
정신 조종을 통해 바라는 대로 사람을 조종하고 무언가에 대한 기억을 지울 수 있다……?
그 경우 큰 감정과 기억을 공유한 이의 접촉을 통해 벗어날 기회가 선사될지도 모른다…….
Richard:
근력
기준치: |
70/35/14 |
굴림: |
33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몇 가지 떠오르는 것은 있지만 확실치 않다. 그래도 작은 희망이나마 생겼으니, 걸어볼 만 하다. 뇌에 힘!!!! 을 주고 더 알아볼 수 있는 글자가 없나 책을 열심히 뒤적인다.)
에바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이와 연관되어 있는 건 아닐까 싶어집니다. 혹자는 다른 사람들도요……
우선 가장 큰 감정과 기억을 공유한 이는 에바이니, 자신을 모르는 척하는 에바에게 접촉을 시도하거나 과거를 언급하면 조금 태도가 바뀔 수 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Richard:(이미 한 번 가볍게 묻긴 했는데. 뇌에 힘을 줘도 모르겠군. 책을 제자리에 두고 일어나 네가 있던 계단으로 빠르게 걸어간다.)
에바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계단은 내일 오페라를 볼 때 가볼 수 있겠군요. 지금은 볼 일이 없습니다.
Richard:아……. (눈에 띄게 실망한 기색으로 휴게실로 돌아간다. 책을 가지고 쉬러 갈 수 있을까?)
Richard:(그럼 책으로 머리를 퉁퉁 치며 숙소로 올라간다. 짐은 사용인이 알아서 잘 풀어뒀겠지 싶다.)
휴게실이 있는 옆 건물 2층에 위치한 숙소에는 당신과 에바만이 머무른다 들었습니다.
방문객, 손님들은 모두 오페라 하우스 근처 호텔에서 묵는다나요.
리처드가 숙소에 들어가기 무섭게 사용인들이 노크를 합니다.
숙소에서 할 일이야 뻔합니다. 웰컴 파티를 위해 가꾸는 거죠.
부부 될 사람들의 모습을 거의 처음으로 공식적인 자리에서 드러내는 순간이니 몇 번이나 신경 써도 모자라겠지만…….
Richard:(완전히 질렸다는 표정으로 문을 연다.) 별 일 아니라면 내일 하는 게 좋지 않나?
사용인: 무슨 말씀이세요. 지금쯤 카단 가문의 약혼녀 분께서도 열심히 가꾸고 계실 텐데. 도련님이 손을 놓고 있어서야 괜찮겠습니까? 첫 만남이잖아요.
Richard:이미 만났어. 그리고 지금 준비해도 내일 아침이 되면 망가지는 거 알잖아.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들어오라는 듯 문을 열어주었다.)
리처드는 사용인들의 손길을 받으면서도 영 찜찜한 마음이 가시지 않습니다.
이런 것보다 에바가 더 신경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걸까요?
완전한 저녁이 찾아오고, 리처드의 웰컴 파티 준비는 전부 끝났습니다.
Richard:(일정에 관해 몇 번을 들었지만 아직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저 하라는 대로 움직이는 게 낫겠지 싶다. 지친 기색이 역력하던 표정을 가다듬고 사용인을 뒤로 한 채 먼저 방을 나선다.)
내려간 홀에는 아까보다 사람이 적습니다. 웰컴 파티에 참여하는 인원만 남은 거겠죠.
초청된 가수가 느릿한 연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는 게 들립니다.
웰컴 파티는 말 그대로 결혼식의 주인공들과 그 친인척, 초대받은 하객들이 이 오페라 하우스에 도착한 것을 환영하기 위한 목적으로 열렸습니다.
몇 번이나 반복되어 들리는 말마따나 왕가에서도 직접 축하하러 내려올 정도라면 어마어마한 규모와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뜻이겠죠. 그러니 이렇게까지 화려한 시작을 알리는 게 분명합니다.
거의 모든 상황이 린튼 가와의 정략혼이 결정되었을 때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린튼 가와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요.
Richard:
지능
기준치: |
65/32/13 |
굴림: |
13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리처드는 꼭 이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3일이 무언가를 준비하는 듯한 3일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리처드의 가족과 가문 친인척이 몇 서있습니다.
척 봐도 고급진 옷, 고급진 장신구, 장인의 손을 타 정성껏 세공된 시계와 브로치 등을 단, 대놓고 ‘나는 대귀족이다’라고 선언 중인 사람들입니다.
아마도 저 자들이 카단 가문 사람들인 모양입니다.
Richard:(그러니까 카단 가문이란 건 들어 본 적 없다고. 아찔해지는 기분에 주위를 둘러보는 척 아는 얼굴들이 있는 쪽으로 간다. 먼저 저쪽에 가지 않아도 알아서 붙여 놓지 못해 안달일 터.)
친척: 리처드, 이게 얼마만인가. 이런 좋은 소식으로 다시 만나뵈어서 정말 반갑군.
Richard:
관찰력
기준치: |
65/32/13 |
굴림: |
1 |
판정결과: |
대성공 |
멀리 서 있는 카단 가 사람들 대다수의 눈빛이 흐리멍텅함을 발견합니다.
웃고 떠드는 모습은 굉장히 자연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일부 작위적인 구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속해서 리처드를 엿보고 있다는 사실도요.
Richard:(어쩐지. 처음 겪는 상황은 아니다. 주변에서 걸어오는 말에 적당히 대꾸하며 네가 어디 있는지 열심히 훑어본다.)
문득,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대화하던 에바가 주위를 훑던 당신과 눈이 마주칩니다.
무리에게 양해를 구한 에바는 당신을 보자마자 금방 종종걸음으로 다가옵니다.
그의 반가운 기색 언저리에 미미한 애정의 자락이 자리한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친애로 가득한 저 낯. 그러나 그는 당신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하고 있습니다.
Eva Kadan:리처드 공. (티나게 밝아진 낯으로 네게 다가간다.) 와 주셨군요. 웰컴 파티에 안 오시면 어쩌나 걱정했어요.......
Richard Moore:사용인들이 꽤 억척스러워서 끌고 나오더군요. 그래도 조금 눈이 피곤하긴 하오. (다가온 네 허리를 살포시 짚고서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인다.) 잠시 바깥 공기라도 쐬러 가지 않겠소?
Eva Kadan:네? 그렇지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올려다본다.) 가족과 친척 분들이 걱정하실 거예요....... 제가 조금이라도 자리를 비우면 찾아다니시는 분들이라.......
Richard Moore:나라도 이런 딸이 눈에 안 보이면 불안하긴 하겠지. (시선을 마주치며 비로소 웃어 보였다.) 사용인에게 말을 전하라 할 테니, 응? 정말 안 될까?
Eva Kadan:
SAN Roll
기준치: |
50/25/10 |
굴림: |
7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 (초조한 기색으로 손을 입가에 가져다댄 채 고민하더니,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인다. 붉어진 뺨을 감추려 문이 열린 테라스 쪽으로 살며시 몸을 틀었다.) 그, 그럼 잠깐만.......
Richard Moore:다들 이해하실 거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둘이지 않소. (부드럽게 달래며 짚고 있던 허리를 단단히 감싸는 동시에 사용인을 불러 귀엣말을 건넨다.) 좋아요. 잠깐이면 충분해.
Eva Kadan:(홀에서 어느 정도 멀어져 조용해지자 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눈치를 살핀다.) ...... 여기라면 괜찮나요?
Richard Moore:한결 낫군. (정말로. 자신을 쳐다보던 그 눈길들이 사라지니 숨통이 트인다. 스스럼없이 네 몸을 품에 안고서 두 눈을 가만히 바라본다.) …… 그대는 안 피곤하오?
Eva Kadan:아....... (갑작스레 품에 안기니 어쩔 줄을 몰라 곤란해 하는 기색을 눈에 띄게 보였다. 눈동자가 방황하다 그저 고개를 저었다.) 괘, 괘, 괜찮아요, 아직은....... 모레의 피로연 파티는 이것보다 더 성대할 테니 지금은 바쁘지 않은 축에 속하죠....... 그렇죠?
Richard Moore:(정말 기억하지 못하고 있나. 손 안에 들어오는 허리도, 곤란함을 띈 눈동자도 무엇 하나 변하지 않았는데. 입맛이 씁쓸한 게 썩 좋지 않다.) 그렇긴 하오만 신부 측은 이래저래 휘둘릴 일이 더 많지 않은가 해서. 이상한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소? 혹은…… 뭔가 잊어버렸다든지?
Eva Kadan:그게....... (문득 네 말에 조금 신중하게 말을 고르려는 듯 뜸을 들였다. 안쪽을 한 번 힐끔대고서 이어질 말을 감히 꺼내기가 망설여지는 기색이었다.) 그러니까....... 리처드.
에바가 당신의 이름을 부를 무렵이었습니다. 갑자기 에바네의 가문원이 에바의 이름을 부르며 찾아옵니다.
에바의 어깨를 두드리며 등장한 가문원은 호탕한 웃음과 함께 말합니다.
카단 가문원: 이번에 처음 만났는데도 꽤 리처드 씨가 마음에 든 모양이야? 아주 시선을 떼지 못 하는군 그래!
하지만 이쪽에도 관심을 줘야지. 부모님께서 찾으신다.
에바는 난처한 기색을 띠면서도 당신의 품에서 떨어져 나옵니다.
Eva Kadan:...... 죄, 죄송해요. 이만 가야 할 것 같아서....... 나머지 파티도 잘 즐기시길 바라요.
떠나는 가운데, 문득 에바가 당신의 뺨에 입 맞추려는 듯 고개를 기울이다, 이만 거두고 사라졌습니다.
Richard Moore:……. (약간이라도 좋으니 자각이 생겼다면 알아서 찾아오겠지. 그래도 이대로 손을 떼고 있는 것도 싫다. 테라스 난간에 기댄 채 열린 문 너머로 파티장 안을 노려본다. 그냥 데리고 도망치는 게 빠르지 않나? 마차도 있겠다. 아니면 파티가 끝나고 저쪽 사용인들을 적당히 구슬려서 끼리끼리 술이라도 마시게 할까. 양 손끝을 모아 토도독 두드린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요, 가문원과 함께 떠난 에바는 내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Richard Moore:쯧. (혀를 차고 홀로 들어가 술을 몇 잔 연달아 마시고 주변을 살핀다. 시선은 여전한가? 파티는 언제 끝나지…….)
문득 문득 느껴지는 시선은 여전합니다. 피곤한 사람들이 한둘 떠나고 있는 걸 보니, 이만 마무리하고 들어가도 괜찮을 것 같아 보입니다.
Richard Moore:(혹시 네가 올지도 모르니 아까 그 사용인을 붙들어 홀로 네가 돌아오거든 알리러 오라고 단단히 일러둔 뒤 숙소로 올라간다. 엄청나게 피곤하다…….)
오늘 하루 동안 일어난 일들이 여전히 이해도, 납득도 가지 않습니다.
에바의 방은 맞은편에 있습니다. 당신과 에바의 방 가운데 방들은 모두 비어있는 모양입니다. 이 숙소에 머무르는 이는 둘뿐이라니 당연하겠지만요.
주어진 리처드의 방은 넓고 침대는 푹신하나, 영 잠이 올만한 상황은 아닙니다.
분명히 한 번 겪었던 에바의 죽음과 총소리가 선명한데. 달빛 아래 지진할 정도로 지독한 꽃향기를 뿌린 히스 꽃도 선명한데, 그 모든 일이 마치 물거품처럼 사라지다뇨…….
누워서 뒤척이던 리처드는, 문득 창밖에서부터 시선을 느낍니다.
Richard Moore:(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간다.)
집요한 시선입니다. 인간의 눈이라기보다는 거대한, 가늠하기 어려운 존재의 시선에 가까운 감각입니다.
지독하게 당신을 응시하는 시선을 따라 창밖을 보면, 그곳은 놀라우리만치 시커먼 밤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딱히 어떤 형체가 보이진 않습니다.
시선은 창밖에서부터 온 사방으로 퍼져 피부를 따갑게 찔러댑니다. 마치 꼭 잡아먹힐 것만 같은 두려움. 생존에서부터 비롯된 선연한 공포감이 혈관을 타고 흐릅니다.
Richard Moore:
SAN Roll
기준치: |
59/29/11 |
굴림: |
97 |
판정결과: |
실패 |
(이미 내게 생지옥을 마련해 주었으면서 이번엔 또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걸까. 온몸에 한기가 돈다. 술이라도 마시는 게 좋을까, 만약 네가 아직 안 자고 있다면 괜찮은 걸까, 생각이 끝없이 솟아나 방에서 나와 복도를 두리번거린다. 아무도 없나?)
Richard Moore:(휴게실 쪽에서 빛이 새어나오는지 확인한다.)
아무런 기색도, 빛도 보이지 않습니다. 모두가 잠에 든 것 같군요.
Richard Moore:(기척을 죽이고 네 방으로 다가가 두 번, 천천히 노크한다. 설마 여태 돌아오지 않은 건…….)
Richard Moore:(문이 잠겼는지 문고리를 돌려 본다.)
Richard Moore:……. (두 번 더 노크한다. 이번엔 아주 아주 아주 조금 세게.)
Richard Moore:
듣기
기준치: |
60/30/12 |
굴림: |
48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안쪽에서 무언가 기척이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문을 열어줄 생각은 없어 보입니다.
Richard Moore:허어……. (잠시 문고리를 쥔 채 고민하다 낮은 목소리로 문 너머에 말을 건다.) 에바. 나야, 리처드.
여전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습니다. 다만, 문 너머에 에바가 있다는 것 정도는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Richard Moore:(문짝을 부술까 말까 고민하며 일단 휴게실로 내려간다. 여기에 머무르는 사용인은 아예 없나? 그리고 술도 없나? 식당까지 가긴 귀찮다.)
파티 후 정리된 술은 보이지만, 사용인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Richard Moore:(아무 술이나 한 병 들고 터덜터덜 계단을 올라 다시 네 방 앞까지 가더니, 그대로 문에 기대 앉아 열심히 술을 마신다. 자고 있다면 깨울 용기가…… 없다.)
여전히 안쪽에서는 인기척이 조금씩 느껴집니다. 그것뿐입니다.
Richard Moore:(그거면 됐다…… 고 생각하다가도, 자고 있는 게 아니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도달한다. 입술을 꽉꽉 깨물었다.)
지능
기준치: |
65/32/13 |
굴림: |
6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지금으로서는 마땅한 수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당신이 문밖에 있는 걸 알면서도 나오지 않는 거라면, 나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건가? 싶은 생각이 드네요.
Richard Moore:……. (그렇다면 오히려 더 불안한데. 그렇게 불침번 아닌 불침번을 서다가 까무룩 잠든다.)
언제 잠들었지……. (잠에서 깨 빈 병만 자리에 남겨두고 어기적대며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 몸을 맡긴다. 왜 못 나오는 걸까. 왜지. 험한 꼴만 안 당했으면 좋겠다. 시야가 아른아른하다.)
침대에 누워 있노라면, 아까 전과 같은 몸을 짓누르는 듯한 거대한 시선이 느껴집니다.
그대로 마비라도 걸린 듯, 가위에 눌린 듯 움직이지 않는 몸이 서서히 굳어갑니다.
Richard Moore:? (눈동자도 안 움직이나??)
점점 뇌가 둔해지고 사고가 멈출 것만 같은 순간…….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립니다.
식은 땀이 뺨과 목덜미에 맺힘을 자각하고 나면, 어느새 몸은 다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상태로 돌아왔습니다.
Richard Moore:(제 몸을 여기저기 만지며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한 박자 늦게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연다.) 누구야.
문을 열면 그곳에는 초조한 기색의 에바가 서있습니다.
에바는 대뜸 이 밤에 당신을 찾아온 것에 대한 사정 설명이나 사과도 없이 안으로 성큼 들어옵니다.
그리고 방을 살피더니, 빠르게 방문과 창문을 모두 닫고 창밖을 내다봅니다.
Richard Moore:저기. (아직도 선명한 감각에 얼굴을 구기다 네게 가까이 다가간다.) 뭐가 계속 쳐다보는 것 같지 않나?
Eva Kadan:(황급히 몸을 뒤돌더니, 제 검지를 세우고 신중한 눈으로 널 올려다본다.) 쉿.......
Richard Moore:……. (순순히 입을 꾹 다물고 멀뚱멀뚱 네 얼굴을 마주 바라본다.)
Eva Kadan:(그대로 조금 까치발을 들어, 네 뺨을 감싸잡고 반대쪽 뺨에 입술을 꾹 눌렀다가 떨어진다.) .......
에바가 입을 맞추고 떨어져 나오자, 아까까지 공기 중에 서려 있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집니다.
공포심이 가시고 답답한 곳에서 탁 트인 바깥으로 나온 것처럼 숨이 제대로 쉬어집니다.
고개를 들면 그 앞에는 당연하게도 에바가 있습니다.
당신을 바라보는, 그러니까 당신만을 바라보는 에바입니다. 눈 한 번 깜박이는 것조차 아깝다는 양 그리움과 애정으로 뒤덮인 두 눈으로 가만 당신을 응시하다 간신히 고개를 돌립니다.
Richard Moore:…… 에바. (작은 목소리로 네 이름을 부르며 다시 돌아보길 바라며 채근한다.)
Eva Kadan:....... (바닥만을 바라보며 애써 외면하던 시선을 어쩔 수 없이 슬쩍 돌린다.)
Richard Moore:괜찮아? (압박감이 사라져서인지 부드럽게 물으며 네 손을 조심스레 잡는다.)
Eva Kadan:...... 괜찮아요. 잠깐 앉으시겠어요? (네 손을 잡고 조금 진정한 얼굴로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 저보다는 리처드 공이...... 더 걱정이었으니까요. 별 일 없으셨나요?
Richard Moore:……. (네 말에 다시 얼굴을 찡그린다. 기억은 안 돌아온 거야? 그러다 자신이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네가 모를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네 옆에 나란히 앉아 잡은 손을 만지작거린다.) 그대가 여기 있다는 게 가장 별 일이오. 어떻게? 왜? 분명…….
Eva Kadan:리처드 공, 그러니까....... (다시금 뒷말을 고민하며 말끝을 흐린다. 눈꺼풀을 들어올려 네 시선을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그 시선에는 여느 때와 같은 맹목과 애정이다.) 리처드 공, 저는 대귀족의 입장으로 행동을 자유롭게 하기가 어려워요. 가문원 분들의 시선이 어디서든 따라다녀요. ...... 아시겠어요? 그러니까, ...... 말 또한 골라가며 해야 하는 법이죠.
Richard Moore:그래. 이상하리만치 집요한……. (이것도 실언인가. 잠시 아무런 말이 없다가 잡고 있던 네 손을 끌어 손바닥에 하나하나 글자를 적기 시작했다.)
이런 것도 곤란해?
Eva Kadan:....... (그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다시 네 얼굴을 번갈아 바라본다. 망설이는 듯하더니 똑같이 네 손바닥에 글자를 적었다.)
언제 다시 감시를 받게 될지 몰라요. 그들은 어디에나 있으니까....... (그리고는 창문을 다시 한 번 힐끔 돌아본다.)
Richard Moore:음……. (적어도 지금은 평범한 연인처럼 보이겠지. 평범한 연인이라. 이 얼마나 우리에게서 동떨어진 단어인가.)
자꾸 쳐다보면 더 수상해. …… 파티 때 하려던 말은 뭐야?
Eva Kadan:......
그것도 지금 여기서 전부 말할 수는 없어요. 그저 계획이 있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뿐....... (그 말을 끝으로 다시금 자연스럽게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아까 저를 기억해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듣고 보니까 저도 꼭 초면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구요. ......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하는 거겠죠, 분명.
Richard Moore:운명이 아니야. 내게 네가 얽혀든 거지. (바보 같은 점은 여전하군. 혼자 아는 듯한 말투를 쓰는 것도 어쩌면 기분이 나쁠지 모른다. 한숨을 쉬며 네 이마에 입술을 누른다.) 초면이 아님은 보증하오. 그러나…… 그 모든 걸 다시 그대의 손에 들려 주어도 되는지 모르겠소. 확실한 건 내가 그대를 원한다는 것, 그리고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 두 가지요.
Eva Kadan:....... (뺨을 붉게 물들이며 입술을 우물거리고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 했다. 머뭇머뭇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 얼굴을 가리려 들었다.) ...... 그렇다면 더욱 더, ...... 몸조심 해 주세요. 그것만이 유일한 길이에요.
Richard Moore:잠깐만. (이 이후로 언제 다시, 불완전하게나마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지. 네가 얼굴을 가리기 전에 그 손을 잡아당겨 제 품으로 무너뜨린다.) …… 줄곧 기다렸어. 바보 같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돌아오지 않을까 기대했어. 네가 준 세상은 네가 없어서 괴로웠어. …… 그러니까, 너도 조심해. 이상한 느낌이 들면 아픈 척이라도 해. 그래야 나도…… 크흠. 알겠소?
Eva Kadan:....... (품속에서 가린 표정은 좀처럼 드러내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얌전히 품에서 빠져나와 등을 돌린다.) ...... 네. 약속할게요....... 절대로 불안하게 만들지 않을 테니까....... (말끝을 흐리며 도망치듯 방문 문고리를 열었다.) ...... 그럼, 실례했어요. 리처드 공.
Richard Moore:…… 불안해도 좋으니 혼자 움직이지만 마시오. (이 이상 붙잡아도 곤란한 일만 생길 터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여는 네 뒤에 붙어 뺨에 자잘한 입맞춤까지 남기고서야 한 걸음 뒤로 물러난다.) 내일 봅시다. 에바 양.
에바를 돌려보낸 후 그대로 다시 잠들기 전, 리처드는 직감합니다.
누군가 당신과 에바를 감시하고 있습니다. 에바는 현재 자유로운 상태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이 3일은, 결혼식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준비하는 3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부활은? 도대체 누가 주도한 짓인가요? 어떻게 해야 상황을 정상 궤도로 돌려놓을 수 있죠?
의문과 불안감을 배제해 보자면, 어쨌든 당신과 에바는 이곳에 살아 있습니다.
닿았던 온기는 분명 산 자의 그것입니다. 살아 있었습니다…….
Richard Moore:……. (꿍꿍이가 있으니 이 먼 곳까지 데려와 고립한 거겠지. 과거의 일을 되짚으면, 역시나 왜 이렇게까지 체면을 세우고 이유를 만들어 가면서 일을 벌이는 건지 모르겠다. 답답한 머리를 붙들고 침대 위에서 뒤척이다가 잠을 청한다.)
그렇게 해가 뜬 다음 날에는 조금 느긋하게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낮부터 이 오페라 하우스는 분주합니다. 오늘은 왕가에서 손님이 오는 날입니다. 왕가를 위한, 귀족만을 위한 공연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듣기로 공연은 이번이 초연이라고 합니다. 왕가와 연결된 거대한 귀족 가문의 결혼식을 축하하여 새로이 제작된 극이라나요.
겨울을 배경으로 하는, 이루어지지 못한 절절할 사랑 이야기… 라고만 들었습니다. 굉장히 유명한 극작가가 집필했다니 내용을 기대해 봐도 좋겠는걸요.
오페라가 열릴 예정인 2층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Richard Moore:(움직이기 싫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그러나 네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움직여야 한다. 굼벵이처럼 움직여 준비를 마치고 2층으로 향하는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하필이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이야기? 결혼식을 앞두고요? 어쩐지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그러나 의문을 곱씹기도 전 에바가 당신에게 다가옵니다.
Eva Kadan:리처드 공! (널 발견하자 환한 낯으로 총총 다가온다.) 간밤에는 안녕히 주무셨나요?
안부를 전하는 태도는 어제 밤 제 방에 들이닥친 그 사람이 맞는지 의문스럽습니다.
Richard Moore:…… 덕분에. (들켰나. 네 밝은 얼굴과 달리 입꼬리만 겨우 올리고서 다가오는 네게 정중히 손을 뻗었다.) 에스코트하죠.
(심리학 가능한지?)
Richard Moore:
심리학
기준치: |
10/5/2 |
굴림: |
80 |
판정결과: |
실패 |
(ㅋㅋ)
Eva Kadan:...... 고마워요. (네 손 위에 제 손을 살포시 겹쳐 얹고서는 곁을 따라 걷는다.) 저기, 리처드 공. 혹시, 저기....... 제안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Richard Moore:뭐든 말씀하시죠. (걷는 내내 주변을 면밀히 살핀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겠다!)
Eva Kadan:그게....... (귀끝을 붉히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혹시 오페라가 끝나거든, 이따 같이 밤바다를 거닐고 싶어서....... ...... 저희 둘만이서요.
Richard Moore: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군요. (네 귓가로 시선이 닿자 왜인지 자신마저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았으나, 찰나의 기시감에 마른 입술을 핥았다.) 단순한 호기심인데, 꼭 바다여야 하는 이유가 있소?
Eva Kadan:(예상치 못한 질문에 두 눈을 깜빡인다.) ...... 예쁠 것 같아서....... 아, 안 되나요? 바깥에 절벽이나 해안가가 예쁘다고들...... 말씀하셨거든요.
Richard Moore:잠깐 들여다보는 정도라면야 예쁘긴 하겠지요. 그러나. (네 눈을 빤히 쳐다본다.) 아름다운 건 때로 위험하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밤이라면 더더욱. …… 아무도 우리를 바라볼 수 없다면 응하리다.
Eva Kadan:(조금 시무룩해진 낯이었다가 이어지는 말에 다시 화색이 돌아온다.) ...... 정말요? 네, 아무도 없이 둘이서만요.......
부부가 될 몸이니까요. 보다 서로를 자세히 알아가면 좋겠죠.
저 사람 좋은 미소와 매끄러운 말투는 어디서부터 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거짓인지 가늠이 잡히지 않습니다.
Eva Kadan:그럼 전 이만 친척 분들께 돌아갈게요. (돌아가기 전, 잡고 있던 네 손을 잡고서 그 손끝에 살며시 입을 맞추고 떨어진다.) 이따 다시 만나요.
Richard Moore:……. (역시 그 제안은 불안하다. 불안하기에 거절할 수 없다. 정말 동일인이 맞나, 아니라면 더 문제 아닌가. 멀어지는 네게 고개를 끄덕이고 익숙한 얼굴들을 찾아 그 사이로 섞인다.)
리처드가 친척들에게 다가가자,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옵니다.
친척A: 이 결혼이 성사된다면 분명 우리 가문의 위상은 더 높아지겠지. 네가 수고가 많다, 리처드. 어때, 에바 카단 양은 마음에 드는가?
Richard Moore:…… 만족하고 말고 할 것도 없지. 다만 저쪽이 너무 신부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아 아쉽군. 이미 약속된 결혼이거늘 너무 숨기려 드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친척A: 뭐, 어때. 카단 집안 쪽에서 혼담이 들어온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행운이잖아. 이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에바는 너를 굉장히 좋아했잖아? 껌딱지처럼 맨날 붙어다니고, 예전부터 네 일이라면 껌뻑 죽었지.
그러니까 분명 일사천리일…... 응? 내가 방금 뭐라고 했지?
Richard Moore:…… 카단 집안 쪽에서 혼담이 들어왔으니 행운이라고 했지. 이보게, 사람이 많으니 너무 혓바닥을 놀리면 좋지 않아. (완전히 글러먹었구만. 갈수록 자신도 할 수 있는 말이 줄어들 것임을 깨닫는다.)
친척A: 내가 다른 사람이랑 잠깐 착각한 건가? 말실수를 했군.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도 별 것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쳐버린다.) 뭐, 아무튼 이따 공연이 시작할 때 다시 만나자고.
Richard Moore:그러지. 시작하기 전에 앉는 게 좋을 거야.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피곤함에 한숨을 내쉰다. 이래서야 공연이고 뭐고 볼 생각이 안 드는 게 당연하잖아.)
공연이 시작되기 전, 오페라 하우스의 2층과 3층을 조사할 수 있습니다.
Richard Moore:(일단 방금 올라온 계단부터 돌아본다. 여전히 그 음침한 시선은 느껴지나?)
Richard Moore:(홀 안을 둘러본다. 그러고 보니 나는 2층에서 보는 건지 3층에서 보는 건지도 모르고 여기 있다는 걸 깨달았다…….)
2층 홀은 넓고 텅 비어 있습니다. 2층 관객석으로 이어지는 콘서트홀 입구가 존재하며, 군데 군데 공연을 기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귀족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지금은 공연이 시작되지 않았으므로 콘서트홀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Richard Moore:(그렇게 대단한 양반들을 대기시키는 것도 좀 아닌 처사인데. 티 테이블 쪽을 흘끔거리며 서성인다.)
3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맞은편에는 그런 게스트를 위한 티 테이블이 존재합니다.
티 테이블 근처에는 손님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리처드는 티 테이블을 살피거나, 손님들에게 말을 걸어볼 수 있습니다.
Richard Moore:(테이블을 살피며 일단 주변에서 신경 쓰이는 대화를 하고 있는지 귀를 기울인다. 말을 걸기엔 아직 머리가 복잡하다! 시간이 필요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건 라벤더 티입니다. 불면증을 치료하기에 좋은 효능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공연 전에 마시기 합당한 걸까요?
문득 근처에 앉은 귀부인의 웃음 소리가 들립니다.
귀부인: 듣기로 에바 씨가 직접 온실에서 키운 걸 가져와 돌리고 있다던데. 그 집 가문원들에게도 모두 건넸대요. 특별한 레시피로 제작된 차라나요.
과연 맛이 달라요. 한 모금만 마셔도 기분이 아주 좋아지네요.
Richard Moore:……. (마시지 않는 게 좋겠다. 널 의심해서가 아니라, 널 믿으니까. 손을 거두고 귀부인에게 다가간다. 어쩔 수 없지.) 제 신부가 사랑스러운 취미를 가지고 있나 봅니다?
귀부인: 어머, 무어 가문의 리처드 공. 그렇다니까요. 차를 가져온 사용인의 설명을 들은지라 자세한 사항은 잘 모르겠지만, 돌아가는 길에 더 받고 싶은 기분이군요.
귀부인의 주변에서는 이번 공연을 보러 온 귀족들이 보입니다. 문화 생활에 조예가 있다는 사람들은 본 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네요.
Richard Moore:그렇습니까. 모두에게 나눌 만큼 길렀다면 부인께 드릴 만한 양도 남아있을 겁니다. 그럼 이만. (사무적으로 웃어 보이고 3층으로 걸음을 옮긴다. 공연의 내용엔 별 감흥이 없다. 어차피 결혼을 위한 결혼식도 아닌 것을.)
3층 객석으로 이어지는 입구와, 사람들의 짐을 맡기는 [캐비닛]이 존재하는 홀입니다. 3층 홀은 1층과 2층에 비해 지나치게 사람이 없고 텅 비어 있습니다. 인적이 드물어 쓸쓸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지금은 공연이 시작되지 않았으므로 콘서트홀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Richard Moore:(주저하지 않고 캐비닛으로 가 하나씩 손을 댄다. 설마 전부 잠겨 있겠어?)
자세히 보니 열려 있는 칸이 하나 존재합니다.
Richard Moore:(비어 있는 거 아니야? 따위의 생각을 하며 조용히 연다.)
열어보면 공연에 관련된 책자와 편지 봉투가 놓여 있습니다.
Richard Moore:(벽에 기대 남에게 보이지 않도록 한 뒤 책자부터 펼쳐 꼼꼼히 읽는다. 공연에 관심은 없지만 나중에 네가 감상을 물으면 대답은 해야 하지 않겠나.)
멸망의 위기가 들이닥친 세상에서 죽음에 이른 연인이 다시 부활함으로 시작되는 시놉시스라고 합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 했지만 부활 후 다시 그 사랑을 이루기 위한 고군분투… 라나요? 젊은이들에게 호평이라고 합니다.
Richard Moore:……? (초연이라고 하지 않았어? 공연의 내용마저 모욕적이다. 대놓고 엿 먹어라, 하는 기분이다. 책자를 팔에 끼고 편지 봉투를 찢지 않도록 살살살 연다.)
편지 봉투 겉면을 보니 에바의 가문원이 쓴 편지인 모양입니다.
받는 사람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으나, 적혀 있는 주소가 묘합니다.
잉글랜드 세번 밸리. 브리체스터와 캠사이드? 여러 개의 주소가 나열되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보내려는 편지가 맞긴 한가요?
편지 내용을 보려 하니, 계단 위로 올라오는 누군가의 걸음 소리를 듣습니다.
Richard Moore:(편지를 정장 재킷 안쪽 주머니에 넣고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다른 손님들이 캐비닛을 잠시 쓰고 다시 내려갑니다.
Richard Moore:(이제 아무도 없나?)
Richard Moore:(전보다 벽에 밀착해서 편지 내용을 본다. 보는 내내 흘끔흘끔 계단 쪽을 살핀다.)
Richard Moore:
SAN Roll
기준치: |
55/27/11 |
굴림: |
23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Richard Moore:
지능
기준치: |
65/32/13 |
굴림: |
63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집안 사람들이 에바에 대한 기억을 잊은 건 이 주문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편지 발신자는 에바 가문의 사람이니 이 가문에서 꾸민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Richard Moore:(카단의 이름을 쓴 린튼이 아니고? 기분이 엄청나게 나빠졌다. 그리고 정독은 그냥 말 그대로 읽는 행동? 인가?)
Richard Moore:(2회차에 들어갔다…….)
(본능적 혐오감으로 읽는 데에 몇 초나 걸렸다…….)
(리처드는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생각할 정도의 인간이지만 3회 정독을 훌륭하게 해냈다. 그 사이 특별한 일은 없었을까?)
세뇌 주문이 있다면 세뇌를 푸는 주문 또한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럼 그건 어디에 존재할까요. 이제부터 알 필요가 있을까요?
확실한 사실은 에바는 그 주문을 알지 못할 거라는 것입니다. 알았다면 진작 사용했을지도요.
Richard Moore:(세뇌 주문을 흘리고 다니는 것도 모자라서 해주 주문까지 흘리고 다닐 만큼 멍청하단 말인가……. 여러 의미로 감탄했다.)
사용인: 도련님! 여기 계셨군요. 곧 공연이 시작될 예정이니 2층으로 함께 가시죠.
Richard Moore:적어도 몇 층에서 보는지 정도는 미리 알려 달라고. 가지.
사용인: 2층 5번 박스석이 도련님의 자리라고 합니다. 당연히 에바 님께서도 함께 동석하시고요.
Richard Moore:음. (아예 사이드로 빠지게 하진 않는 건가. 불쾌감을 느끼며 털레털레 걸어간다.)
오페라 글라스를 챙겨들고 박스석으로 향하는 길목, 이미 입구에서 에바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요한 웃음과 함께 손을 내밉니다. 내부에서는 오케스트라단이 악기를 조율하는 듣기 좋은 불협화음이 들려옵니다.
Richard Moore:(내민 손을 잡아 손등에 입을 맞추고 꽉 잡은 채 지정석으로 향한다.)
공연 시작 전, 은은한 노래 소리가 콘서트 홀을 채웁니다. 왕가의 사람들은 맞은 편 박스석에 앉아있는 모양입니다.
호위병과 경찰이 단단하게 지키고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짐작이 맞는 듯합니다.
5번 박스석 안에는 에바와 당신만이 있습니다.
에바는 자신의 가문원들이 바로 옆 박스석에 앉아있노라 알려 주며 웃지만, 어쩐지 억지 웃음처럼 느껴집니다.
과연 옆 박스석, 약간의 거리 너머에서 시선이 느껴집니다.
칸막이 건너편에서 오페라 글라스를 챙긴 몇몇의 사람들이 당신을 빤히 바라보다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립니다. 어쩐지 미미한 불쾌감이 듭니다.
Richard Moore:……. (이 끈질긴 시선은 마치 심해의 해초 같다. 발목에 치렁치렁 묶여 절대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드는, 그런. 네 손을 조심스레 당겨 다시 손바닥에 적는다. 시선은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던 이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괜찮소?
Eva Kadan:.......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는 듯이. 그리고는 얼굴을 조금 가까이하며 제게로 시선을 돌리게끔 뺨을 감싼다.) 저희 가문 분들은 언제 어디서나 소중한 양자를 지켜보고자 하시죠. ...... 오페라가 시작되면 괜찮아질 거예요. ...... 역시, 여전히 공연에 아무 기대가 없으신가요?
Richard Moore:과연. (손길에 눈가를 찌푸리면서도 거부하지 않았다. 넌 여기에서도 괴로웠구나. 말을 삼키며 네 뺨과 귓가에 차근히, 몰래 입맞춤을 남긴다.) 내용이 좀, 신경쓰여서 말이오……. 그래도 그대와 보내는 시간이니 허투루 보낼 수 없지. 그대는 기대하고 있었소?
Eva Kadan:...... 네. (고개를 끄덕이더니 간지러운 입맞춤에 수줍은 웃음을 흘리며 힐끔 눈을 돌린다.) ...... 이건 비밀이지만, ...... 제가 직접 요청한 내용이거든요. 싫으세요?
Richard Moore:그렇다면야……. (그렇다면야, 모욕적으로 느낄 필요도 없는 것이다. 오히려 몰두해야 할지도 모른다. 네 손을 고쳐 잡고서 손등을 만지작거린다.) 어쩌다 그런 내용을 골랐는지 물어도 되겠소?
Eva Kadan:그건....... (조명이 하나씩 꺼지기 시작하자 웃음을 머금은 채 손을 놓지 않았다.) 보고 나면 알게 될지도 모르죠.
문득 극장의 불이 꺼지고 무대 위로 배우가 한 명 올라옵니다.
극을 시작하기에 앞서 부부가 될 이 결혼식의 주인공들을 위한 시 낭독이 있을 예정이라나요.
왕가의 손님을 위한 것이겠지만 맑은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퍼지는 게 썩 듣기에는 좋습니다.
우연 또는 자연의 무상한 이치로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때때로 시들지만,
죽음조차 그대가 자신의 그림자 속에서 헤매인다고 자랑치 못하리다
불멸의 시구 속에서 당신은 시간과 하나가 되는도다
사랑의 시이니 부부가 될 사람의 앞날을 축복하기에는 모자람이 없겠죠.
Eva Kadan:...... 셰익스피어의 소네트18이에요. 이어지는 시구가 무엇인지 아시나요?
Richard Moore:알고 있지만, 몰라서 내게 묻는 게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인간이 살아숨쉬고 두 눈이 볼 수 있는 동안, 이 시가 존재하는 한 당신은 영원히 살아있을 거예요.'
그리 읊조리며 당신을 바라보는 낯은 한참이나 고요합니다.
마치 고백 내지 청혼처럼 느껴질 정도의 진중한 어조입니다.
어두운 조명 아래 배우들이 나오고 무대 장치가 빛을 받아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사랑하는 이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걸 지켜보던 주인공은 결혼 대상자의 집안이 이 세상에 재앙을 불러올 것을 깨닫고 사랑하는 이를 살리기 위해, 재앙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 하다 제 목숨을 바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다른 이와의 결혼이 진행되는 모습을 먼 발치에서 바라보는 주인공은 결코 자신의 사랑과 닿지 못합니다.
그러는 와중에도 세상을 좀먹는 재앙의 징조는 충실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외사랑이 될 수밖에 없는 감정을 끌어안고 그는 손에 피를 묻혀 이 세상을 지키려 합니다. 달빛이 비추는 꽃밭에서 주인공은 숨을 거두고, 그리고…
네, 그렇죠. 어딜 봐도 당신과 에바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극은 기묘하게 흘러갑니다.
주인공과 그가 사랑하는 이를 지켜보던 신의 개입에 관한 내용. 신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라 했던가요?
얼핏 보면 그 ‘신’은 꽤 너그러워 보입니다. 목숨을 바친 주인공을 살려준 것도 모자라 그가 사랑하는 이와 맺어질 수 있게끔 도왔으니까요.
그런데 무언가 이상합니다. 드디어 소원대로 결혼식을 치루게 된 두 사람은,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신’의 인도에 따라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빛이 그들을 둘러싸고, 하객들은 일제히 나와 축복을 외치며 춤을 춥니다.
하지만 그 춤과 노래에는 분명한 광기가 깃들어 있습니다. 하객들의 눈에는 기쁨보다는 환희가, 행복보다는 맹목이 존재합니다.
주인공은 연신 하객들을 뒤돌아보며 발걸음을 멈추지만 신은 정지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이 완전히 ‘신’이 거주하는 곳으로 사라지고 나면 무대 위는 하객을 연기하는 무용수로 가득 찹니다.
현란한 바이올린 소리와 함께 무대 장치로 추정되는 눈이 내립니다.
조명이 어두워지고 무대 바닥에 묘지를 연상시키는 십자가 모양의 빛이 비춰지더니 극이 막을 내립니다.
허나 관객석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옵니다. 어찌 되었든 두 사람이 이어졌다는 사실에 해피 엔딩이라 치부한 거겠죠.
Richard Moore:
지능
기준치: |
65/32/13 |
굴림: |
8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홀에 있는 명화를 떠올립니다. 연인을 자신의 세계로 인도하던 신…….
칸막이 너머 에바의 가문원들은 커튼콜을 주시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어쩐지 몽롱한 기색이기도 합니다.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여력이 부족해 보입니다.
Eva Kadan:
SAN Roll
기준치: |
50/25/10 |
굴림: |
3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이 찰나를 노리듯 에바가 당신의 손을 잡아 이끕니다.
밤 바다로 나가자는 거겠죠. 그 눈은 굉장히 진중합니다.
Richard Moore:(극의 내용에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도 네 얼굴을 보자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에바는 당신의 손을 잡고 오페라 하우스를 빠져나와서는, 절벽 아래로 내려가 해안가를 따라 도망치듯 뛰었습니다.
바닷바람이 폭풍처럼 귓전을 때리고 오페라 하우스의 소란스러움이 멀게 느껴질 정도로 오래 이동했다 싶을 무렵,
바다로 나오니 미묘하게 피부를 찌르던 시선 같은 감각이 사라집니다.
Eva Kadan:...... 리처드....... (네 몸을 힘주어 끌어안고서 품에 얼굴을 묻었다.)
Richard Moore:…… 고생했네. (그간의 고생을 고작 이 한 마디로 달랠 수 없겠지. 바다로부터 감싸듯 네 몸을 마주 안고서 머리를 아주 천천히 쓰다듬었다.)
Eva Kadan:...... 보고 싶었어요....... 엄청, 엄청 많이요. (이 말 하나를 내뱉었을 뿐이었는데도 왈칵 눈물이 차는 기분이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가만히 눈을 감았다.) 당신과 다시 닿게 된 것만으로도 너무 기뻐서, 그래서, .......
Richard Moore:…… 그래, 나도, ……. (좀처럼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저 이 거센 바람에게서 너만은 지켜내려 애를 쓸 뿐.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소리를 내며 고개를 숙인다.) 하루하루가 너무 길어서, 매일 네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언제쯤 끝이 올까, 그것만 생각했는데.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Eva Kadan:리처드....... (고개를 들어 뻗은 손으로 네 뺨을 쓸어주었다.) 리처드, 살아 주었군요....... 내 마지막 소원을 들어 준 거네요. ...... 고마워요. 정말? 매일같이 내 생각해 줬어요? (물기어린 눈으로도 결국 배시시 웃으며, 닳을까 겁나는 손길로 계속해서 쓸어내렸다.)
Richard Moore:그렇게 길고 긴 시간이었는데도 잠들 때가 되면 네 모든 걸 되새기기엔 부족하더군. (그저 끝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을 뿐인 자의 변명일까. 젖어든 네 눈가도 하염없이 쓸어 닦아주다 결단을 내리고 미간을 좁혔다.) …… 이번에야말로, 도망치자. 아무도 우리를 모르는 곳에 도착하면…… 나랑 결혼해 줘. 전부 버리고 너 하나만 보면서 살게. 아무도 널 건드릴 수 없도록 지킬게. 맹세해.
Eva Kadan:...... 제가 어제 말 못한 계획이 있었다는 거, 기억해요? (네 손을 겹쳐 잡고서 그 손에 뺨을 부빈다. 그리웠던 온기를 다시 한 번 느끼기라도 하는 것처럼.) 절 살려낸 주체가 당신을 원하고 있어요. ...... 극의 내용처럼, 결혼식이 끝나는 즉시 데려가려고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결혼식에서 함께 도망쳐요, 리처드....... ...... 네, 이번에야말로요.
Richard Moore:벌써 그게 몇 년 전 일인데 아직도 날 원하는 모양이지. 지긋지긋하군. (네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추고서 다시 한 번 품에 꼬옥 안았다.) 그래. 쉽지 않겠지만, 할 수 있어. 그 놈들이 다시 널 마음대로 망가뜨리는 꼴은 못 봐. (그제야 생각이 난 듯 품에서 편지 봉투를 꺼내 네게 보였다.) 이거, 도움이 될까?
Eva Kadan:처음에는 당신을 다시 불러낼 생각이었다는 걸 알고 절망했었는데.......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조금은 기뻐해 버린 거 있죠. 너무 이기적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어요....... (쓰게 웃고서는 네게서 봉투를 받아 열고 주문을 읽는다.) 아, 이거....... 제게도 걸려 있었던 주문이네요.
Richard Moore:전혀 이기적이지 않은 걸 가지고 이기적이라 생각하는 게 문제야. 너는. (머리카락과 귓가, 뺨, 턱까지 끝을 모르고 매만지며 한숨을 쉰다.) 그럴 것 같았어. …… 역으로 주문을 걸고 도망치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싶더군. 다들 우리를 잊어버리게 한다든지.
Eva Kadan:이 세뇌를 푸는 주문을 알아내지 못 하는 이상, 아무래도 방법은 그것밖에 없겠죠....... (널 따라 똑같이 가벼운 한숨을 쉬고서 옅은 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사실, 당신과 여기서 처음 마주했을 때에는 정말로 당신을 기억하지 못 했었어요. ...... 그러니까 덜컥 겁이 나더라고요. 이대로 당신을 정말로 기억하게 되지 못 할까 봐.......
Richard Moore:하나의 가능성으로 남겨야겠군. (네 시야에서 치울 셈으로 다시 봉투를 가져와 주머니에 넣었다.) 알고 있었어. …… 정말 즐거워 보였거든. (그렇게 만든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에도 화가 났지만, 그래도.) 괜찮아. 수백 번, 수천 번을 잊어버려도 나는 잊지 않아. 기억하게 해도 괜찮을지 고민하긴 했다만……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너를 사랑하니까, 원하니까, 되찾았겠지. 내가 그렇게 못미더운가?
Eva Kadan:으으응....... 아니에요. (고개를 양쪽으로 저으며 장난스레 입을 삐죽였다.) 왜 고민했어요? 제가 잊더라도, 수백 번 수천 번만큼 더 기억나게 해 주세요. 떠오르게 해 주세요. 제가 당신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저는 수백 번 수천 번 당신을 다시 사랑하게 돼 버리겠지만요.
Richard Moore:네가 다시 아플까 봐. (삐죽대는 입에 쪽 입을 맞추고도 모자라 몇 번을 연달아 입술을 맞댄다.) 모든 사랑에 아픔이 동반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을지도 몰라. 그래. 다시 태어나도, 시간을 거슬러도 내가 널 사랑한다는 것까지 모두 가르쳐 줄게. 또 잊어버려도 끝이 없는 사랑을 바칠게. …… 이 바보가. 그런 말을 하면 내가 한 멋있는 말이 유치해지잖아.
Eva Kadan:후후....... 그렇지만 그렇잖아요? 만약 제가 이대로 당신을 기억하지 못하고 정말 정략혼으로 함께 살았더라도, 당신은 절 사랑해 줄 테고 저는 당신을 또 사랑했을 텐데. (발그레한 얼굴로 양팔을 뻗어 네 뒷목에 감싼다.) ...... 그래도 기뻤어요. 드디어 당신이랑 동등한 위치에서, 당신한테 걸맞는 여자가 된 기분을 느껴 봐서요.......
Richard Moore:태평한 소리만 하기는……. 늘 너는 내가 위에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아주 오래 전부터 계단 밑에 있었어. 내가 원하는 여자는 너밖에 없었다고. (아무리 말해도 너는 현실을 바라봐야 했겠지. 자연스레 제 팔을 내려 허리를 안고 턱을 살짝 당겨 내려 시선을 유지한다.) …… 앞으로도 그럴 거야. 가장 위에 있든, 아래에 있든 네 곁에 내가 있어.
Eva Kadan:그래도 이제, 당신에게 상처 투성이의 모습을 안 보여 줄 수 있어서 기쁜 건 어쩔 수 없어요. 지금의 제가 그토록 꿈꿔 오던 모습이었는걸. (그대로 고개를 기울여 네 입에 짧은 입맞춤을 남겼다. 거리가 좁혀진 얼굴로 널 마주보며 작게 소리내어 웃는다.) 정말 동화 속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아. ...... 내일 여기에서 무사히 빠져나가게 되거든, 다시 한 번 꿈을 꿀 수 있게 해 주세요. 다시 한 번 당신을 욕심낼 수 있게 만들어 주세요.......
Richard Moore:동화보다 달콤한 현실을 만들어 주려면 열심히 노력해야겠는데……. 한 번은 싫어. 평생 탐내면서 안겨 줘. (널 따라 희미하게 웃고서 네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체취를 한껏 들이마신다. 꿈이…… 아닌 거지. 정말로.) 세뇌를 거는 주문이든 푸는 주문이든, 결혼식 도중에 걸어야겠지. 많이 움직여야 할 텐데, 다시 태어났다고 체력도 아기가 된 거 아니야? (일부러 농담을 하며 요동치는 감정을 숨긴다.)
Eva Kadan:으응, 곤란하겠네요. 제가 자랑할 수 있는 건 집안일과 체력밖에 없었는데....... 당신한테 맡겨야겠다. (저도 농담을 던지며 네 뒷목을 다정한 손길로 가지런히 쓸어준다.) 그래도 저, 지금의 모습도 잘 어울리나요? 걸맞은 여자가 되려고 여기에 오기 전까지 엄청나게 공부하고 왔는데....... 저 같은 사람이 이런 걸 입어도 되나, 하고 고민도 하면서 말이에요. 후후.
Richard Moore:안고 뛰어야겠군. (머리도 좋지만 입맞춤을 원해. 속삭이며 제 입술을 톡톡 두드린다. 그러다 눈을 크게 뜬다.) …… 이 세상 누구보다 사랑스러워. 누구나 널 보면 사랑에 빠지고 말 거야. …… 오늘 밤도 따로 잠들어야 해?
Eva Kadan:(만족스러운 대답에 웃음을 띠고서 입술에 쪽 입을 맞춰준다. 이어지는 물음에는 귓가를 붉히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네? 저기, 그, 그치만....... 혹시 모르니까.......
Richard Moore:자는 동안 또 네가 기억을 잃을 수도 있어. (진지하게 대답하곤 낮게 웃으며 붉어진 귓가를 깨물고 싶은 기분을 억눌렀다.) 왜? 무슨 생각을 했길래 그렇게 말을 더듬으시나.
Eva Kadan:아, 아니이....... (이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반대편으로 고개를 휙 돌려버린다.) 아, 아무 생각 안 했어요. 정말, 예전부터 맨날 이런 식으로 짓궂은 질문이나 하시고....... 시간이 지나도 리처드는 리처드네요....... 흥.
Richard Moore:누가 봐도 엄한 생각을 한 얼굴이잖나. (타고나길 부채질에 재능이 있나 싶은 네 행동에 결국 귓가에 쪽쪽 입을 맞춰버린다.) 원한다는 한 마디면 밤새도록 입을 맞춰 줄 텐데. 에바.
Eva Kadan:으응, 잠깐, 간지러워요....... (간지러움에 눈을 꼭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괜히 가볍게 널 흘겨본다.) 정말,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뻔히 아시면서. 결혼식 날에는 어떻게 될지 모를 꽤 심각한 상황인데에....... 저질, 변태.
Richard Moore:입을 맞추겠다 했지, 다른 말은 안 했어. (자신을 흘기는 이 눈빛조차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 눈가에도 입맞춤을 남기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뱉는다.) 그 다음은 온전히 둘이 되면 할 거야. 보이는 게 좋다면 어쩔 수 없지만?
Eva Kadan:저, 정말....... (마음이 간질거려 가볍게 네 몸을 톡 밀어냈다.) 그, 그럼....... 내일 밤에는 같이 있을게요. 오늘 밤에는 이따 돌아가거든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만큼 감시가 더 심해질 거예요. ...... 그러니까 내일 밤에는...... 떨어져 있던 만큼 예뻐해 주셔야 해요.
Richard Moore:…… 괜찮은 거야? (지금이야 그 시선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돌아가면……. 순식간에 착잡한 표정이 되어 네 머리를 쓰다듬다 머리칼 위로도 입을 맞춘다.) 정말이지. 누구 말마따나 어떻게 될지 모를 상황에 꼬리를 흔들고 있으니 어쩐담.
Eva Kadan:...... 부끄러워요. (그래도 입꼬리를 올린 채 살그머니 네 손을 감싸잡는다.) 어차피 이틀만 더 버티면 괜찮아질 거라 믿으니까요. 그리고, ...... 이전에 수없이 사람을 해쳤던 때에 비해서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 조금 걸을래요?
Richard Moore:고통엔 나은 게 없어. 어서 덜어내지 않으면 점차 더해질 뿐이야……. (바보 같은 여자. 더 이상 말꼬리를 잡지 않고 고개를 끄덕인 뒤 허리를 안고 있던 팔을 풀어준다.) 그러지. ……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살까?
Eva Kadan:...... 정말요? (밝아진 얼굴로 널 올려다본다. 그러다 머뭇거리며 네 눈치를 살폈다.) 그치만, 바다를 별로 안 좋아하시는 것 아니었나요? 아까...... 바다에 나가자고 하니 싫어하는 기색처럼 보여서. 위험하다고.......
Richard Moore:그거야 아깐 그 사람들이 그렇게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잡은 손을 고쳐 깍지를 끼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바다의 끝을 바라본다.) 둘이 나가면 혹시 널 해치러 올까 해서. 과보호라 해도 할 말 없겠군.
Eva Kadan:...... 후후, 다행이다. 그런 거라면 기뻐요. (맞잡은 손을 만지작거리며 저도 바다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였다.) ......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거든요. 바다.......
Richard Moore:…… 앞으로, 질릴 만큼 보자. 너무 질려서 네가 떼를 쓸 즈음엔 또 새로운 곳을 알아보면 되겠지. 산속에 꽁꽁 숨은 오두막이든, 사람이 엄청 많은 도시든, 아예 우리와 다른 말을 쓰는 사람들 속에 섞여도 함께라면 즐거울 테니까.
Eva Kadan:...... 응. 남부럽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랑 함께 있는 이상 말이에요. 덧붙이며 머릿속으로 삼십 년을 가까이했던 저택을 자연스레 떠올린다.) 그렇지만 역시 그 정원에도 또 가고 싶네요, 한 번쯤....... 있죠, 여기에 오기 전까지 그 정원은 잘 있었어요? 다른 사용인들이 잘 가꾸어 주고 있었으려나.......
Richard Moore:아무도 그 정원에 못 들어가게 했어. (담담하게 대답하며 바닷바람에 흘러내린 제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다.) 이제 그 정원엔 온통 히스 꽃이야. 한 송이 한 송이 전부 네 이름을 붙이고…… 가끔은 불러도 보고. 잠들기도 하고……. 저택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누가 뭐라 하든 너만을 위한 곳인데, 네가 갈 수 없다는 건 말이 안 되지.
Eva Kadan:....... (제가 존재하지 않던 시간 동안의 너를 상상할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상상하기가 싫었다. 애써 외면하고 싶을 정도로 가슴이 아렸다. 맞잡은 손에 힘을 꾹 쥘 뿐이었다.) 당신이 돌봐 주고 있었구나. 꽃들도 기뻐하고 있었을 거예요....... 되살아나기 전의 기억은 없지만, 분명 몸은 사라졌어도 나 또한 그곳에서 존재하고 있었을 거야. ...... 리처드, ...... 사랑해요.
Richard Moore:응, 사랑해. …… 내가 사랑하는 너는 지금 여기에 있어. 그리고 놓지 않을 거야. (세상에서 가장 큰 욕심이자 고집이다. 홀로 보냈던 시간은 혼자 기억하며 곱씹으면 된다. 너는 이미 충분하고도 넘칠 만큼 아파했다. 나는, 나의 몫을 치르고 있을 뿐이다.) 이왕이면 일이 잘 풀려서 돌아갈 수 있다면 좋겠군. 몇 년 사이에 네가 가문의 안주인이 될지 모르는 일이잖나.
Eva Kadan:정말, 그런 건 당치도 않는다구요. 저한테 과분해요. 저한테는 요 사흘 만으로도 충분히 과분했다구요. (소리내어 웃고서는 눈을 감고 지나간 시간을 되짚었다.) 바다도 보고, 오페라 하우스에 앉아있기도 하고....... 내일이면 또 파티의 주인공이 될 테고, 그 다음에는 성대한 결혼식도 하고....... 처음부터 이랬다면 좋았을 텐데. ...... 후후, 슬슬 바람이 차가워져요, 리처드.
Richard Moore:오히려 내가 명문가의 데릴사위가 되는 건가. (일부러 너스레를 떨어 주의를 돌리곤 조용히 네 목소리를 들었다. 새삼스럽다. 이런 목소리였지, 이런 따스함이었지. 자꾸만 확인하게 된다. 손을 놓더니 천천히 편지 봉투를 바지 주머니로 옮기고 겉옷을 벗어 네 어깨에 걸친다.) 짧은 이별을 달래기 위한 키스를 나누어야 할 시간인가?
Eva Kadan:오늘 밤에도 엄청 보고 싶을 거예요. (겉옷에서부터 네 온기가 느껴져 따뜻하다. 네 호의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손길을 거절하지 않았다. 못내 아쉽다는 듯한 얼굴을 했지만, 이내 짧게 웃고서 발걸음을 멈춘다. 고개를 기울여 키스해 달라는 듯 눈을 살짝 감아 보인다.) .......
Richard Moore:또 쓸쓸한 밤을 보내게 해서 미안해. (웃음기가 어린 입가를 살살 쓰다듬다가 조심스레 입술을 겹친다. 그대로 대고만 있다가 왜인지 처음 입을 맞출 때보다 긴장해선, 아랫입술을 슬쩍 물었다 놓았다.)
Eva Kadan:...... 생각보다 담백한 키스였네요. (쿡쿡 웃음을 참으며 네게서 등을 돌려 뒤돌아본다. 네가 덮어준 겉옷 자락을 꼭 쥐었다.) 혹시 그들에게 오해받을지도 모르니 먼저 들어갈게요. 조금만 있다가 들어와요. 알겠죠? 추우니까 오래 있지는 말고.......
Richard Moore:발랑 까졌군. (돌아보는 네 얼굴에도 짧게 키스를 남겼다. 어서 들어가라는 듯 손을 휘휘 젓고는 그대로 제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는다.) 그래. 너야말로 내 걱정만 하다 감기 걸리게 생겼으니 어서 들어가라. 아침에 보자.
에바가 사라진 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다시 숙소로 돌아갑니다.
리처드는 복잡한 심경을 느낄 수도 있고, 이 부활을 기회라 느낄 수도 있겠죠.
어제처럼 따가운 시선과 공포감 없는 편안한 밤을 맞이합니다.
방에 돌아오니 티 테이블 위 라벤더 차가 놓여 있습니다.
푹 자라는 에바의 배려겠죠. 작은 쪽지도 함께 존재합니다.
Richard Moore:(찻주전자 째로 차를 들이마시고 침대에 뻗는다. 솔직히 어느 쪽이 네가 가장 행복해지는 길인지 알 수 없어서 복잡하다.)
…….
(그러다 벌떡 일어나서 쪽지를 펼쳤다! 잊어버린 거 아니다!)
라벤더 티를 마시자 미미하게 몽롱한 감각이 스며들고, 생각이 편안해지며 무엇을 해도 괜찮겠다는 느낌이 듭니다.
익숙한, 그리고 오랜만에 보는 에바의 필체였습니다.
Richard Moore:충분하다고……. (한숨을 쉬면서도 쪽지를 잘 접어 가방에 넣고 다시 침대에 눕는다. 왠지 기분이…… 몽글몽글해졌다.)
...... 얼마 지나지 않아, 리처드는 얌전히 잠에 듭니다.
라벤더 티 덕분인가, 아니면 간밤에 바닷바람을 쐬어서인가. 당신은 평소보다 맑은 정신으로 잠에서 깨어납니다.
내일은 드디어 당신의 결혼식 날입니다. 네, 결코 멀쩡한 결혼식의 형태는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도대체 그 신은 누구이며 과거의 당신과 에바를 어떻게 데려다 놓았는지 알 수가 없지만, 어쨌든 이 결혼식이 정상적으로 끝까지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 하나만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그런 당신의 마음과 전혀 상관없이 오페라 하우스는 저녁에 있을 피로연을 위해 분주합니다.
숙소에서 나와 마주치는 사람들은 모조리 당신에게 결혼 축하한다는 말을 한 번씩 건네지 못해 안달이 나 있습니다.
그래도 뭐, 과거로 미루어 볼 때 결혼 대상이 생판 남인 것보다야 에바여서 다행이죠.
점심 식사는 에바와 함께합니다. 에바의 집안 사람들과 대면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니까요.
당신은 오페라 하우스 1층에 위치한 식당으로 향합니다.
Richard Moore:(사용인들에게 잘 갈고 닦여 멀끔한 차림새로 터벅터벅 내려간다…….)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 긴 테이블이 당신을 반깁니다.
에바가 벌써 자리에 앉아 당신에게 인사하고 있습니다. 에바의 가문원들도 몇 보이고, 당신의 집안 사람들도 몇 착석한 상태네요.
식사를 시작하기 전 식당 내부를 둘러봄이 가능합니다. 조사 가능 장소는 창문과 부엌입니다.
Richard Moore:(눈앞에 사람들을 두고 이래도 되는 걸까? 싶지만 그냥 돌아다닌다. 겸사겸사 미리 온 사람들에게 목례를 하곤 우선 부엌을 조사한다.)
부엌 입구를 지나가다 보면 내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들립니다.
Richard Moore:
듣기
기준치: |
60/30/12 |
굴림: |
24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직원A: 그러고 보니 카단 가에서 이번 결혼에 공을 엄청나게 들이고 있다지?
식이 끝나자마자 바로 부부 된 사람들을 데리고 어디에 간다 들었는데. 그래서 뒤풀이 파티는 하객들끼리 진행된다나.
직원B: 그러고 보면 이번 결혼식의 주인공들, 꽤 묘하단 말이야. 에바 그 사람, 난 한 번도 들은 기억이 없거든. 그리고 그 가문…… 원래부터 이렇게 대단한 가문이었나……?
직원A: 원래는 린튼 가가 저 정도의 명성을 독차지 하지 않았어? 그런데 그 집안은 어쩌다 망한 건지…….
Richard Moore:……. (양자라 했고. 린튼 가야 죄다 목이 날아갔으니. 신인지 뭔지 뭘 이리도 공을 들이나 몰라. 속으로 생각하며 창가로 걸음을 옮긴다.)
창밖을 내다보면 오페라 하우스가 위치한 바닷가 절벽 위에 핀 꽃이 보입니다.
데이지와 히스 꽃이네요. 한데 모아 꽃다발이라도 만들면 예쁘겠는걸요. 그러고보니 부케는 무슨 꽃이면 좋을까요.
그 너머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습니다. 첫날 밤 이 창밖의 바다에서부터 불쾌하고 집요한 시선이 달라붙었었습니다.
Richard Moore:(부케도 이미 준비했을텐데 뭘. 손끝으로 창틀을 토도독 두들기며 생각한다. 그 시선, 간밤 이후로 안 느껴지고 있나? 지금도?)
식사가 시작되려는 건지, 테이블 위에 각종 로스트 비프와 요크셔 푸딩, 비프 웰링턴 등 결코 모자람 없는 화려한 식단이 테이블을 가득 채웁니다.
Richard Moore:(흥. 얌전히 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에바네의 가문원들은 여전히 리처드를 향해 지대한 관심을 보입니다.
가문원A: 내일부터 이제 우리 가문의 일원이 되는 거로군. 우리 집안에 대해 좀 더 깊이 알아갈 생각은 없는가?
가문원B: 신혼 여행지는 정해 두었나? 안 정해 두었다면 우리가 정해 주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네.
Richard Moore:(대충…… 모친과 부친인가. 짐작하며 깨작깨작 야채 종류만 입에 대는 둥 마는 둥 한다.) 물론 알아갈 생각입니다. 카단 가에 비하면 작게 느껴지실 수 있으나 저 또한 가문의 교육을 받고 자라온 몸이니 만족하실 겁니다. 그리고…… 신혼여행은, 에바 양과 둘이 정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군요. 여행이 끝난 뒤 각자 가문을 위해 힘써야 하니 아내 될 사람의 의견을 가장 존중하려 합니다. (부족함 하나 없는 표정과 말씨로 대답하곤 입꼬리를 올린다.)
Eva Kadan:
SAN Roll
기준치: |
50/25/10 |
굴림: |
25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도, 대답을 이어나가는 네 말에 귀끝을 붉히며 고개를 숙인 채 저도 음식을 깨작거린다.)
한참 식사를 하던 가운데, 리처드의 가족 되는 사람이 손뼉을 치며 말합니다.
가족: 그러고 보니, 오페라 하우스 근처 시내에 나가보지 않겠나? 피로연이 곧이니 쇼핑을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날씨도 이리 좋으니 분명 기분 좋은 외출이 될 거요. (에바와 리처드를 번갈아보며 말을 건넨다.)
Richard Moore:(그대로 음식은 더 손대지 않고 식기를 내려놓는다. 음료만 천천히 홀짝인다.) 그렇습니까. 에바 양이 괜찮다 하시면 다녀오지요.
Eva Kadan:(벌써부터 기대로 가득 차 화색이 도는 얼굴이 떠올랐지만, 티를 내면 안 되겠단 생각에 눈치를 살피며 고개만 끄덕인다.)
Richard Moore:그럼 오늘 하루, 제가 에바 양을 모시겠습니다. (아직 식을 올리지 않았으니 못마땅하지만 이리 말할 수밖에. 줄곧 마시던 잔도 내려놓고 허리를 곧게 편 채 가만히 앉아 있는다.)
Eva Kadan:...... 해가 지기 전까지는 돌아올게요. (가문원들의 눈치를 살피다가도, 결국 웃음기를 지우지 못한 채 식기를 움직이는 손을 부지런히 계속했다.)
식사 시간이 무사히 끝나고, 삼십 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 시내로 나갈 마차가 준비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Richard Moore:가시죠. 레이디. (일부러 정말 사용인이 된 듯 허리까지 숙여가며 너를 이끈다.) 이제 막 점심을 먹었으니 충분히 돌아볼 수 있을 겁니다.
Eva Kadan:네, 오늘 하루 잘 부탁드려요. (장난스러운 얼굴로 가볍게 인사를 하고서 마차에 먼저 올라탄다.) 어쩌죠, 엄청 기대되네요.......
Richard Moore:오늘 하루가 아니라, 앞으로. (가볍게 네 말을 정정하고 굳이 맞은편이 아닌 옆에 앉고서 문을 닫는다.) 꼭 하고 싶은 일이라도?
Eva Kadan:글쎄요, 어떠려나....... (기대감이 서린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한다.) 저, 그럼....... 결혼식에 쓰일 부케의 꽃을 함께 고르고 싶어요. 같이 골라야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Richard Moore:……. (아무래도 좋다 생각했던지라 뜨끔한다. 네가 창밖을 보고 있어 다행이라 생각하며 허리를 부드럽게 안고서 다리를 꼰다.) 그럼 가장 먼저 화원에 가지요. 꽃말은 잘 모르니 그대가 알려주어야 할 겁니다.
Eva Kadan:...... 네에. 히스 꽃도 있으면 좋겠네요....... (고개를 돌리자 네 얼굴이 시선에 들어왔다. 곧 네 한 손을 달라는 듯 제 손바닥을 펼쳐 보인다.)
Richard Moore:…… 히스 꽃이라면 있지 않을까요. 이 근처에도 피어 있는 걸 봤습니다. (여전히 깍듯하게 대하며 순순히 손을 겹쳐 얹는다.)
Eva Kadan:(네가 내민 손을 잡고서 제 얼굴에 가까이하더니, 이내 고개를 살짝 숙여 그 손바닥에 조용히 입술을 맞췄다.) ...... 이걸로 돌아갈 때까진 괜찮을 거예요, 리처드.
Richard Moore:무엇이? (이해할 수 없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 네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Eva Kadan:...... 눈치 못 챈 거예요? (조금 놀란 얼굴을 하더니 눈을 가늘게 뜬다.) 바보.
Richard Moore:……. (바보다. 눈만 끔벅인다.)
Eva Kadan:바보. (고개를 픽 돌리더니 다시 한 번 내부에 둘만 있는 것을 새삼스레 확인하고, 제 손바닥을 펼쳐 하나씩 접으며 말을 이었다.) 창밖에서 그것들이 달라붙었을 때 뺨에 한 번, 오페라가 시작되기 전에 손에 한 번, 바다로 나갔을 때 입술에 한 번....... 전부 뭐라고 생각했어요!?
Richard Moore:…… 바다에선, 끌어안기만 해도 괜찮았는데. 아니, 괜찮았습니다만? (컨셉이 철저하게 무너진다. 민망한 얼굴로 뒤통수를 만지작거린다.) 난 전부 사심으로 키스한 건데…….
Eva Kadan:밖으로 나간다고 주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요!? 무, 물론 저도 하고 싶어서 했던 적은 있지만요!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가 깨닫고는 다시 잠잠해진다.) ...... 흐, 흥. 누구 덕분에 잠에 들 수 있고 바깥에 나갈 수 있었는데요.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니.
Richard Moore:그대가 곁에 있기만 해도 괜찮은 줄 알았지. (커진 목소리에 안고 있던 손끝으로 허리를 콕콕 찌른다.) 영광입니다, 나의 부인. 갚을 수 없는 빚을 졌으니 앞으로 언제든 황홀한 입맞춤을 해 드리겠다 약속하지요.
어느새 시내에 도착한 듯, 마차가 작게 덜컹거리다 멈춰섭니다. 오페라 하우스에서 어느 정도 이동하면 나오는 거리인 것 같군요.
Eva Kadan:...... 말이라도 못 하면. 어쩔 수 없네요, 제 남편이 될 분이라면 최소한의 눈치는 있으면 좋겠어요. (작게 토라진 듯이 고개를 휙 돌리다가도 이내 금방 누그러진 얼굴을 했다.) ...... 그러니까 여기서도 아무 걱정 없이 데, ...... 데이트에 어울려 주세요.
Richard Moore:물론이지요. (눈치는 언젠가 길러지지 않을까, 태평한 생각을 하며 네 입술에 쪽쪽 입을 맞추고 먼저 마차에서 내려 잡으라는 듯 손을 뻗는다. 그러곤 또, 뒤늦게 속삭인다.) 그 주문, 그대에게는 걸어 줄 수 없소?
Eva Kadan:괜찮아요. 당신한테 걸면 제게도 효과가 있으니까. (생긋 웃고서 네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린다.) 그러니 이렇게 마음 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거죠.
따스한 햇살 아래 마차에서 내려 시내로 나옵니다.
광장에는 커다란 분수대가 존재하며 꽃나무가 곳곳에 자리해 있습니다. 꽃잎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아하니, 어느새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군요.
시내 내부에는 기념품 가게와 액세서리 가게, 꽃집 등등이 있습니다. 외에도 필요한 곳들은 전부 있는 느낌이군요.
Richard Moore:한 명만 계속 그러는 건 불공평하오. (작게 투덜거리며 손을 잡고 거리를 걷는다. 눈에 보이는 화원이 있는 방향으로 향하며 나직하게 중얼거린다.) 다시 봄인가…….
Eva Kadan:정말,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게 된 거면 충분하잖아요. (작게 웃고서 어느 때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 좋네요. 우리 정원도 봄에 보는 모습이 가장 예뻤는데 말이죠....... 봄에 결혼식을 올린다는 것도 어쩐지 로맨틱하고. 물론 진짜 결혼식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후후.
Richard Moore:식은 몇 번이고 다시 올리면 됩니다. 계절을 막론하고 사랑을 맹세하는 일 즈음 별 것도 아니지요. (이제와서 진위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실로 중요한 건 다시 이렇게 눈을 마주칠 수 있게 되었단 사실이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바깥에 늘어선 화분들부터 하나하나 본다. …… 솔직히 잘 모르겠다.)
꽃집에는 온갖 종류의 꽃이 다 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데이지, 수국, 히스 꽃이 나와 있습니다.
Eva Kadan:와아....... (허리를 살짝 숙여 반가운 얼굴로 꽃을 살펴본다. 문득 심부름을 나갈 때마다 조금의 꽃을 사서 돌아가곤 하던 옛날 생각이 난 탓이다.) 어쩌죠, 전부 예쁘네.......
Richard Moore:(자연스레 치맛자락을 잡아 구경하기 편하도록 도우며 낮게 웃었다.) 안에도 잔뜩 있을 텐데요, 아가씨.
Eva Kadan:그랬다가는 평생 못 고르게 될지도 모르는데....... (가만히 고민하다가 안쪽으로도 발걸음을 옮긴다. 고개를 들어 꽃을 둘러보면서도, 첫 부케라는 생각에 여전히 고민하는 얼굴이다.) 고민되네요, ...... 역시 장미가 가장 무난할까요? 으응, 그렇지만 수국도 좋고.......
Richard Moore:이번에 못 고른 건 다음에 고르면 되니까. (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게 속삭이며 뒤따라 안으로 들어선다. 제각각 화려하게 얼굴을 자랑하는 꽃들을 보다가, 옆에 나란히 서서 동글동글한 꽃 한 송이를 뽑아든다.) 라넌큘러스?
(이어 또 한 송이를 뽑아서, 다른 손에 들고 미소를 지었다.) 리시안셔스?
Eva Kadan:(네게 고개를 돌리자 양손에 들려진 꽃이 눈에 띄었다. 꽃들과 눈높이를 맞추기라도 하듯 허리를 숙여 들여다보는 제 시선에는 따뜻함이 서려 있었다.) 당신은 이 꽃들이 마음에 들어요? 이왕이면 당신이 골라 주는 꽃이 더 특별하게 기억될 테니까.......
Richard Moore:장미가 무난하다고 하니까, 비슷하게 생긴 걸 좀 골라 봤을 뿐입니다. 선호를 나열하자면 수국이나 안개꽃도 좋아하고……. (실제로 두 송이 다 폭신폭신하게 생겼다. 꽃을 보는 네 모습을 못잖게 따스한 시선으로 보다가, 문득 제안했다.) 이왕 만드는 거, 한두 종류로 하지 말고 좋아하는 걸 전부 넣는 건 어떤지요?
Eva Kadan:그럴까요? 그럼 어느 닮은 아이들인 장미와 라넌큘러스로 만들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안개꽃을 넣으면 예쁠 것 같아요. (손끝으로 조심스레 꽃잎을 건드리며 미소짓고서는, 꽃에 머무르던 시선이 네게로 옮겨간다.) ...... 어때요? 그렇게 만들어도 돼요?
Richard Moore:네. 돼요. (여전히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들고 있던 꽃이 망가지지 않도록 조심히 제자리에 꽂은 뒤 다시 네 손을 잡는다.) 꽃을 고르는 것보다 색을 고르는 게 큰일이지 싶은데.
Eva Kadan:결혼식이니까, 웬만하면 흰색에 가까운 게 예쁘려나요....... (진지한 얼굴로 곰곰이 부케의 완성도를 떠올려본다.)
Richard Moore:흰색에 파스텔 계열로 하면……. (같이 고민하지만 머릿속에선 부케가 아닌 한 송이씩 흩어진 꽃의 이미지만 떠오른다.)
Eva Kadan:....... (잔잔하게 네 반응을 지켜보다 확실한 답이 나올 것 같지 않다 여겼는지 쌩 몸을 돌린다. 어느새 직원에게 다가가 부케에 들어갈 꽃을 부탁하고 있었다.) 네에...... 다른 건 전부 흰색으로, ...... 그리고 장미는 푸른색이 좋아요.
Richard Moore:……. (쫑쫑 멀어지는 뒷모습을 멀뚱히 보다가, 느지막이 따라가 뒤에 서서 자리만 지키고 있는다. 어떤 꽃이든 네가 들면 사랑스러워진다. 그런데 고르고 말고 할 게 있겠나.)
Eva Kadan:(만족스러운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네게 다시 다가와 자연스레 팔짱을 껴온다.) 내일 아침에 식장으로 보내 주시겠대요. 엄청 예쁠 것 같죠.......
Richard Moore:아가씨가 더 예쁘지. (네 말을 태연히 받아치며 계산을 하려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다. 그런데 우리, 내일 도망쳐야 하는데.) 나올 때 던지기 아깝겠군요. 들고 나오심이 어떤지?
Eva Kadan:그, 그런가요...... (벌써부터 아쉬운 얼굴을 하고서 고개를 끄덕인다.) ...... 원래 부케는 던지라고 있는 거 아니었어요? 그치만 역시 아쉽긴 하니까....... 게다가 누군가한테 처음으로 선물받은 꽃이니까요. 가져갈래요.
Richard Moore:딱히 줄 사람도 없으니까. (둘 다 나이가 있다 보니 더더욱 그랬다. 계산을 마치고 다시 거리로 나와 걸으며 눈에 띄게 아쉬워하는 네 볼에 입을 맞춘다.) 그럽시다. 돌아가면…… 정원을 전부 드리지요. 오롯이 우리만의 것으로 둘 수 있게.
Eva Kadan:...... 후후. 정말이죠? 약속이에요...... (환하게 웃다가도 묘하게 평소와는 다른 거리감에 위화감을 느끼다, 무의식중에 팔짱을 꼈다는 걸 깨닫고 허둥지둥 팔짱을 풀었다.) 앗, 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이, 이틀밖에 안 됐는데도 옛날에는 상상도 못할 짓들을 자꾸 스스럼없이 해 버려서.......
Richard Moore:네에. 약속. (마치 네 말투를 따라하듯 굴다가 네가 떨어지자 부루퉁한 표정을 짓고 멈춰선다.) 에스코트로선 기본인걸요. 자, 어서. 이제 상상도 못할 일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걸 받아들이시죠.
Eva Kadan:...... (끄응, 앓는 얼굴을 하다가도 얼굴을 붉히며 조심스레 다시 손을 얹었다.) ....... 부끄러워요. 이런 것에 익숙해지려면 아직 멀었어요....... 아직까지 당신의 태도도 익숙해지지 못 하겠는걸요!
Richard Moore:…… 그럼 그만둘까요? 아가씨 놀이. (누군 안 부끄러운 줄 아나. 아주 큰 마음을 먹고 하는 것이다. 손을 얹고 나서야 목적지 없는 걸음을 재개한다.) 즐기고 계신 줄 알았는데요.
Eva Kadan:…… 별로 즐기고 있지는……. (않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일 거라는 걸 알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이런 호사를 누려보나 싶다.) …… 계속해 주세요. 평소의 리처드도 좋지만 역시 지금의 당신도 꽤…… 좋아요. 정말로 배우자가 된 기분 같달까……. 후후.
Richard Moore:이러다 결혼하고 나서 상상과 달라요, 하고 도망가시는 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말을 뱉고 나니 정말 그러면 어쩌나 하는 마음도 생긴다. 한동안 말투 외의 것들은 크게 달라지지 않도록 해야겠다.) 이제 어디로 갈까요, 아가씨. 느긋하게 주변 구경을 더 해도 괜찮습니다.
Eva Kadan:흐음. 그건 리처드가 저한테 변함없이 대해 주면 도망갈 일도 없지 않을까요? 뭐,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고집쟁이 도련님을 상대하는 일에는 익숙해진 지 오래거든요. (능청을 떨며 슬쩍 웃어 보인다. 길을 걸으며 반짝이는 액세서리 가게가 있는 곳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 예전에는 들어가 볼 엄두도 내지 못했던 미지의 장소 같은 느낌이다.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내리 그곳을 빤히 쳐다보다 퍼뜩 고개를 저었다.) ...... 아, 이대로 조금 더 걸어도 괜찮아요. 날씨도 좋구.......
Richard Moore:고집쟁이 도련님이 아니라 남편이 될 테니 사정이 다릅니다. …… 흐음. (네 눈길이 한 곳에 머무르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하기야 다시 불려온 뒤로 이것저것 치장을 했다지만 직접 사러 간 적은 없겠군. 액세서리 가게가 있는 쪽으로 몸을 틀어 널 끌고 가며 장난스럽게 말을 꺼낸다.) 괜찮은 수가 하나 있는데, 결혼 전에 남편을 거렁뱅이로 만들어 당신에게 매달리게 하는 건 어떠신지요?
Eva Kadan:아, 리, 리처드. (어쩐지 제 속내가 들킨 것만 같아 얼굴이 붉어진다. 제가 들어가도 괜찮은 것일지 여전히 주춤거리며 널 뒤따라간다.) 안 돼요, 그런 거...... 저는 그냥 신기해서....... 저기, 지, 진짜 구경만 할 거니까요.
Richard Moore:어허. (마치 너댓 살 먹은 아이를 타이르듯 헛기침을 하고 가게 문을 열어 들어간다. 이제 더 이상 사용인도 아닌데 뭘 그리 꺼리는 건지. 안에 들어서자마자 네 손을 당겨 제 앞에 세우고 진열장 앞까지 쭉쭉 밀고 간다.) 마음껏 고르시죠. 정 싫다면 주인으로서 명령하지.
Eva Kadan:....... (어영부영 따라 들어오기는 했으나 빛나는 액세서리들에 눈 둘 곳을 모르겠다. 신기하다는 듯이 내부를 둘러보며 처음 들어온다는 티를 여실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진열장 앞에 붙어서는 목걸이나 반지 등 값비싸 보이는 액세서리들을 눈을 반짝이며 구경한다.) 와아, ....... 하나같이 엄청 예쁘네요....... 부, 분명 저한테는 안 어울릴 거예요. 과분해요.......
Richard Moore:(좀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파티장에서 가장 눈이 부셨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아직도 모르는 거냐. 탄식의 말들이 차마 입밖에 나오지 못 하고 혓바닥 위에 맴돈다. 네 옆에 나란히 서서 하나하나 유심히 보다가 손짓으로 직원을 부른다.) 어울리는지 안 어울리는지는 몸에 대 봐야 알지요. 가장 예뻐 보이는 게 어떤 겁니까?
Eva Kadan:아, 그게....... (선뜻 말하기가 부끄러워 네 얼굴과 진열장 안을 번갈아 바라본다.) ...... 그러면, 반지를....... (작게 중얼거리고서는 직원에게 들리지 않게 바짝 붙어 머뭇거리며 덧붙인다.) 저, 그게, 이미 내일 준비된 게 있다고는 들었지만 이왕이면 둘만의 걸 따로 맞추면 좋겠달까, 그래서....... ...... 같이 골라 주실래요?
Richard Moore:…… 좋습니다. 거기에 손목시계하고, 목걸이까지. (귀걸이도 세트로 된 게 있으면 하게 해야겠다. 남의 손을 타 꾸며진 모습도 아름다웠지만 이왕이면 조금이라도 제 손을 거치길 바라게 되는 게, 욕심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부끄러움이 가득한 네 볼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장식으로 들어갈 보석은 어떤 게 마음에 드십니까? 너무 알이 굵으면 불편할 테고, 흠.
Eva Kadan:...... 너,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진열장 안의 반지를 훑어보지만 어떤 게 좋은 건지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게 다이아몬드인가? ...... 이건 진주? 어쩐지 잔뜩 고심하는 얼굴로 잠시 입을 다물었다.) ....... 어쩌죠, 이런 쪽으로는 문외한이라 잘....... 죄송해요. 역시 이런 건 당신 안목에 맡겨도...... 돼요?
Richard Moore:어렵게 생각하거나 사과할 것 없어요. 단순히 좋아하는 색만 골라도 괜찮고. (주렁주렁 매다는 치장은 나도 싫다. 몸을 숙여 진열장을 한참 쳐다보다가, 다이아몬드가 박힌 것과 사파이어가 박힌 것을 짚어 꺼내 달라 부탁한다. 그대로 사파이어 반지부터 하나씩 네 손가락에 끼우며 중얼거린다.) 이 좋은 봄날에 가을과 겨울이 모였군.
Eva Kadan:....... (제 손가락에 이런 반지가 끼워질 거라는 것도, 그것도 네게서 반지를 받을 수 있는 날이 올 거라는 것도 모든 게 꿈만 같기만 했다. 배시시 웃음기가 번진 얼굴로 제 손을 내려다본다. 조금 까슬했던 제 손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누구의 손보다도 예뻐 보인다고 생각했다.) ...... 잘 어울려요?
Richard Moore:…… 응. 그 누구보다도. (잡고 있던 손을 그대로 당겨 손가락 끝에 입을 맞춘다. 직원의 눈길이 느껴지긴 했지만, 어차피 오늘만 보고 말 사람이다. 그럼에도 어떤 게 더 잘 어울리는지 가늠하기 힘들어서 미간을 구겼다.) …… 둘 다 구매하면 안 되는지요? 아니면 하나는 목걸이 쪽으로 돌려야 하나…….
Eva Kadan:정말, 둘 다는 안 된다구요, 후후....... (작게 소리내어 웃고서는 네 손도 끌어와, 제 손을 살포시 겹쳐 같은 반지를 낀 널 상상해 본다.) 당신도 같은 반지를 하게 된다면....... 으응, 역시 이쪽이 더 어울릴까요? ....... 어때요?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를 가리키며 고개를 기울인다.)
Richard Moore:음……. (남성용은 느낌이 다를 거란 이야긴 하지 말자. 확연히 두께가 다른 손을 번갈아 보다가 웃음을 흘렸다. 새삼, 이런 날이 오긴 오는구나 싶어서.) 그럼 다이아몬드로 하죠. 시계도 다이아몬드가 박힌 쪽이 좋겠고……. (금세 시선을 진열장으로 돌려 네게 가장 잘 어울릴 만한 물건을 찾느라 바쁘다.)
Eva Kadan:저, 정말로 반지면 되는데....... 반지면 충분하니까요! (허둥지둥 네 팔을 꼭 붙잡아 당긴다. 다이아몬드라면 엄청나게 비싼 것들 아닌가. 뒤늦게 가격을 실감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러니까 괜찮아요....... 어차피 액세서리에 큰 관심도 없었고, 네에? 리처드.
Richard Moore:이런 곳에서 큰 목소릴 내시면 안 됩니다, 아가씨. (아! 재미있다! 연신 초조해하는 네 허리에 팔을 둘러 품에 고정하듯 안고서 오늘 네가 차고 나왔던 목걸이부터 풀더니 귀걸이, 목걸이, 시계까지 하나하나 제 손으로 채운다. 턱을 붙잡아 돌려 네 시야에 완전히 두고서 부드럽게 웃는다.) 앞으로 관심을 가지셔야죠. 잘 어울리는군요.
Eva Kadan:(민망함과 설렘이 잔뜩 섞여 낯이 간지러운 표정으로 네 손길을 받아들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안절부절 못하는 시선을 내리깔고 있다 네 웃는 낯을 마주하면 다시금 얼굴이 붉어진다. 제 몸의 액세서리들을 훑어보며 슬쩍 눈치를 살핀다.) ...... 정말? 잘 어울려? ...... 이렇게 많이 받아도 괜찮아요......?
Richard Moore:보석이 주인을 못 따라간다고 해야 하나……. (열심히 계산서를 적어내려가는 직원에게 이제야 제 몫의 반지를 부탁한다. 내일도 하고 오면 좋겠지만 아마 전부 준비되어 있겠지. 여전히 널 안은 채 품에서 주섬주섬 지갑을 꺼낸다. 저로서도 얼마만의 사치인지 모르겠다.) 이외에 더 가지고 싶은 건?
Eva Kadan:...... 이미 충분해요! 충분해요....... (네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네 곁에 꼭 붙어 계산하는 옆모습을 올려다보며 머쓱한 얼굴을 했다. 지금은 대등한 약혼자의 위치에 있다지만, 역시 습관은 버리기가 어려웠기에 제 딴에는 최소한의 인사라 생각하고 가볍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 저기, ...... 가, 감사해요.
Richard Moore:감사는 다른 방식으로 받고 싶은데요. (네 인사에 부드럽던 미소에 짓궂음이 물든다. 직원이 꺼낸 반지 케이스를 네 손에 놓고 제 왼손을 척 내민다. 이런 게 행복이겠지. 하루만 더 지나면 이 행복을 온전히 우리 둘만의 것으로 만들 수 있겠지.)
Eva Kadan:아, ....... (반지 케이스를 받아들고서 조심스레 열어보면 저와 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눈에 들어온다. 네 왼손을 잡고서 반지를 끼우려 하자, 긴장된 탓에 손끝이 살짝 떨려 어색하게 웃었다. 결혼식도 아닌데 단순히 이 행위만으로도 행복함이 차올라 목이 메는 탓이었다.) ...... 내일도 이렇게 떨면 안 되는데....... (무사히 네 약지에 반지를 끼워넣고 미소를 띤다.) ...... 예쁘다. 이걸로 하길 잘 했어요.
Richard Moore:(조금씩 떨리는 손끝도,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도 사랑스럽기만 하다. 재촉도 무엇도 없이 그저 그런 네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다가, 결국 반지가 손에 끼워지자 괜히 주먹을 쥐었다 편다. 내일 과연 반지 교환까지 그 자리에 있긴 하려나.) 그렇군요. 내일은 잠시 벗어야겠지만…… 만족스러워 하시니 다행입니다. 이만 나갈까요. (직원에게 진열장 위에 두었던 케이스들과 계산서를 담은 봉투를 건네받고선 나란히 가게를 나선다.)
Eva Kadan:...... 내일이 지나면 평생 끼고 있을 거예요. 평생....... 잘 때에도 안 뺄 거야. (작게 소리내어 웃으며 다시 네 팔에 손을 꼭 감아온다.) 그러니까 당신도 앞으로 절대 빼면 안 돼요. 약속할 거죠?
Richard Moore:그럼, 당연히 약속해야죠. (아까부터 계속 미묘하게 구체화되지 않았던 생각이 이제야 선명해졌다. 어쩌면 나는, 진정한 너를 이제야 보고 있는 걸까. 혹은 아주 오랜만에 본 걸까. 신분이란 사람을 이렇게나 옥죄는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웃기만 하며 네 머리칼 위로 입을 맞추고 근처에 보이는 디저트 가게로 향한다.) 눈이 만족했고 머리를 열심히 썼으니 당분을 보충하죠. 보석만큼 빛나고 예쁜 케이크가 있을 겁니다.
Eva Kadan:(네가 입을 맞추고 떨어지면 간지럽다는 듯 웃었다. 세련되어 보이는 디저트 가게가 눈에 들어오면 걱정이 앞섰지만서도 조금의 기대감이 서려 있던 것도 사실이다.) ...... 괜찮아요? 오늘 저 때문에 이것저것....... (분명 괜찮지 않다고 말할 상대가 아니란 걸 알기에 말끝을 흐렸다. 가게 안으로 따라 들어가면 여전히 내부를 훑어보는 것에 여념이 없었다.) ...... 좋은 냄새.
Richard Moore:왕가와 연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일단 저도 귀족인지라. (게다가 돈을 쓸 곳이 특별히 있는 것도 아니니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연신 걱정만 하다가도 막상 가게에 들어서니 장난감 가게에 처음으로 온 아이처럼 들뜬 모습에 낮게 웃었다. 그래, 이렇게 존재만으로도 웃게 만들어주는 사람은 또 없다.) 응. 좋은 냄새. 천천히 드셔도 되니 마음껏 고르시죠.
Eva Kadan:(식사를 끝낸 지 오래된 시간도 아니었는데 모든 디저트들이 맛있어 보여서 큰일이었다.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하나하나 들여다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기분이었다.) 이것 좀 봐요, 엄청 예쁘다. ...... 이건 어떻게 만든 걸까요? 아, 이것도 맛있어 보이고....... (신기한 반응을 꾸준히 이어나가면서도 네 손끝을 꼭 붙잡은 채였다.)
Richard Moore:설탕을 코팅해서 반짝거리는 게 인상적이군요. (하지만 어떻게 만들었는지까진 모른다. 대신 네가 예뻐 보인다거나 맛있어 보인다고 한 것들을 하나하나 주문하느라 바쁘다. 남으면 숙소까지 보내 달라고 하면 되겠지? 덧붙여 커피도 한 잔 주문하고서 잡힌 손을 살살 흔든다.) 마실 건 어떻게 하실 건지요? 이쪽은 아가씨가 저보다 잘 알고 계실 텐데.
Eva Kadan:(들여다보며 감탄을 하는 동안 어느새 주문을 하고 있는 네 모습을 깨닫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다.) 아......! 죄송해요, 저, 전부 주문하고 싶다는 생각은 아니었는데....... (식탐이 많은 사람처럼 여겨질까 민망함에 전전긍긍하는 낯이었다. 구경하는 것을 그만두고 슬금슬금 네 곁으로 돌아온다.) 그럼 저는 라벤더 티로 할게요. ...... 요즘 라벤더 티를 엄청 자주 마시거든요.
Richard Moore:아, 어제 그거 말이지. 그럼 나도 라벤더 티로 바꾸는 게……. (중얼중얼, 혼자 고민하다 커피 대신 라벤더 티 두 잔을 함께 주문하고 계산까지 마친다. 곁으로 돌아온 네 귓가에 작게 속삭인다.) 어차피 주인도 많이 사는 손님을 좋아하기 마련이니 걱정은 내려놓으시죠. 즐기는 것만 생각하세요.
Eva Kadan:제 라벤더 티, 마음에 드셨어요? 그랬다면 좋았을 텐데....... 피곤하셨을 것 같아서 푹 자길 바라는 마음에. 여기에 오기 전에 라벤더를 좀 길러 봤었어요. (네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처럼 잘 안 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애꿎은 제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리며 목소리가 작아진다.) ....... 자, 자꾸 일일이 반응해서 미안해요. 이런 것들이 낯설어서, 걱정부터 앞서게 되네요.......
Richard Moore:네. 아가씨 덕분에 편히 잠들 수 있었지요. (단순히 취미일 거라 생각했건만 결국 그것도 자신을 위한 일이었다니. 도대체 어디까지 사랑스러워질 생각인 거야. 마구 뽀뽀하고 싶다. 그런 욕망을 누르며 창가 자리로 가서 네가 앉기 좋도록 의자를 뒤로 잡아당긴다.) 뭐든 점점 익숙해지겠지요. 처음부터 모든 걸 잘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Eva Kadan:(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네가 빼낸 의자에 얌전히 착석한다. 양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으고 눈에 들어오는 손목시계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요 근래에 처음인 것들 투성이라 조금 부끄럽지만....... 생각해 보면 옛날부터 늘 제 처음의 상대는 리처드였네요. ....... 그래도 내 모든 처음의 상대가 리처드여서 다행이야. 앞으로도 제가 모르는 것들은 전부 당신이 알려 주세요.
Richard Moore:(푹신한 소파는 앉아서 긴 시간을 보내기에도 좋으리라. 건너편에 있던 소파를 들고 와서 네 옆에 놓고 그대로 앉는다. 네 무릎으로 손을 뻗어 조그만 손을 쓰다듬는다. 잠깐 느슨해져도 괜찮겠지.) 그게 전부가 아니야. 예전부터 우리는 서로의 처음이었어. 여태 전부 가져갔는데 이제 와서 양보할 수 있을 리가. 그래도 두 번째 사랑은 안 가르쳐 줄 거야. 욕심쟁이 아가씨.
Eva Kadan:(발그레 상기된 얼굴을 옆으로 돌리면 익숙한 네 얼굴이 보인다. 네 말에 그만 작은 웃음을 터뜨리며 단단한 손을 꼭 겹쳐 잡았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두 번째 사랑 같은 거, 생각해 본 적도 없어. ...... ...... 만약 당신이 정말로 정략혼을 하고 다른 사람과 살았다고 해도 말이에요. 나는 다음 사랑을 절대 찾지 않았을 거예요.
Richard Moore:전제조건부터 틀려먹었군. (네 마음을 조금만 빨리 알았으면 집을 나가는 한이 있어도 정략혼따위 하지 않았겠지. 그러나 너를 탓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는 말은 하지 않기로 한다. 그저 다른 손을 뻗어 네 코 위를 콕콕 찌를 뿐이다.) 이제 우리가 새로 맛보게 될 사랑이 있다면 자식 말고 또 있겠나. 아, 그래도 아기 돌본다고 나는 뒤로 떠미는 건 싫은데.
Eva Kadan:....... (얼굴이 빨갛게 물든 채 눈이 커진 채로 깜빡인다. 네 옆자리를 욕심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찬 일이었는데, 이제는 그 다음을 욕심낼 수 있다는 실감이 다가와서였다.) ...... 마, 만들 거예요? 아기....... 아니, 싫어서가 아니라, 저기, 저는, ...... 엄청 기쁘달까, 상상만으로도 행복하고....... ...... 부끄럽네요.
Richard Moore:솔직히, 네가 많이 힘들 것 같아서 꺼려지긴 하는데……. 만들기 싫다고 무조건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고, 양자를 들일 수도 있고……. (애정의 증명, 존재의 증명, 그리고 어떻게 보면 인간의 존재의의. 그런 머리 아픈 이야기는 아무래도 좋다. 이번엔 붉어진 볼을 꾹 누르며 낮게 속삭인다.) 왜 부끄러운데?
Eva Kadan:부, 부끄럽죠, 당연히......! (머리카락을 넘기며 잠시 행복한 가정의 표본 같은 이미지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그 자리에 너와 제가 있을 수 있다니, 네 걱정이 무색하게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 그래도 사실, 서른이 넘으면서부터 아기는 가져보고 싶다고 생각했었으니까요....... 아, 저기, 응큼한 의미가 아니구, ...... 돌봐줄 수 있는 생명체가 있다는 건 좋잖아요. 지금은 그 자리에 꽃들이 들어차고 있어서 잊고 지냈지만....... 당신과 함께라면 그 기쁨은 열 배일 거예요. 후후.......
Richard Moore:서른인가…… 난 그보다 한참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어. 널 닮은 아이가 온 집안을 뛰어다니고, 정원을 산책하기도 하고, 우리 품에서 잠드는 상상을 하면 왠지 견딜 수가 없어지거든. (그래서 고백했던가. 왜인지 그 당시의 곤혹스럽던 네 표정이 떠올라 잠시 시선을 창밖에 두었다.) 나는 우리 아가씨가 나 하나만 돌보는 일도 벅찬가 했지. 아이가 자라면서 우릴 엄마, 아빠 하고 부르고…… 거기까진 상상이 잘 안 가지만 말이야.
Eva Kadan:그, 그건...... ....... 당신 옆에 있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제게는 충분히 큰 욕심이었고 어쩔 때에는 송구스럽기까지 했으니까요. (어쩌면 현재 이상의 것을 바라서는 안 된다고 꾸준히 재단해 버린 건 스스로였을지도 모른다. 그랬던 만큼 더 지금 이 순간이, 지금의 이 대화가 이상처럼 느껴지는 걸지도 모르고.) ...... 역시, 만들고 싶어요. 낳고 싶어요, 아기....... 조급해하지는 않을 테지만 이제 더 이상 상상으로 남겨두는 일은 최소한으로 하고 싶어요. 욕심을 내서라도...... 그래도 돼요?
Richard Moore:…… 으음. (솔직히 쉽게 좋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이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동의한다. 그리고 만들고 싶다. 하지만 그러다 만에 하나 또 너를 잃는 일이 생긴다면……. 사랑하는 이의 욕심이라면. 무심결에 제 미간을 손끝으로 짓눌러 편다.) 하늘의 뜻에 따라야 할까. 이미 말했듯 우리가 무조건을 약속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 무슨 일이 있어도 널 우선하는 내게 실망하면 안 돼. 이미 한 번 들어줬잖아. 그렇지?
Eva Kadan:....... (혼나기라도 한 것처럼 조금은 시무룩해진 얼굴이 되었다. 네 생각도 맞는 말이었기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상적인 대답을 해 주길 바란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무어라 더 말을 하려다 이내 입을 다물고 그저 고개를 끄덕인다.) 네, ...... 알겠어요. 제게는 당신이 있어 주는 걸로도 충분히 행복하니까.......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떨구었다.)
Richard Moore:…… 에바. (오 년 전 너를 위해 살아 달라는 말에도 순응했다. 그 말을 다시 듣는다면 똑같은 결과를 만들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염려가 많아 한 말이긴 했지만 눈에 띄게 실망하는 모습에 한숨을 쉬고 귓가에 바짝 입술을 댄다.) 노력할게. 밤이든 낮이든 노력한다고 약속하지. 나는…… 너랑 우리 아이 둘 다 원해. 반대로 생각하면 이해가 안 가는 일도 아니지, 응? 무조건 안 된다는 말이 아니잖아.
Eva Kadan:....... (목소리가 제 귓가에 닿으면 그제서야 눈썹을 늘어뜨린 채 네게로 시선을 돌렸다. 스스로가 어린애 같은 투정을 부리고 있다고도 생각하지만 저도 사람인지라 자꾸만 욕심이 늘어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순순히 고개를 한 번 더 끄덕였다.) ...... 네. 급한 건 아니니까요. 제가 당신만 있어도 행복하다고 하는 말은 전부 사실이라는 것만 기억해 줘요. 천천히...... 천천히, 일단은 서로가 있는 일상에 다시금 익숙해지고 싶어요. ...... 지금은 그래요.
Richard Moore:그래. 저번과 달리 시간은 아주 많아. 그 시간을 모두 너에게 쏟고 싶으니까…… 눈앞의 일부터 생각하자. 사실 그렇게 심각한 사안도 아니야. 아이는 정말 아차하는 순간에 생길 수도 있다고. (가령 네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마구 안았다든지. 너만 들을 수 있도록 덧대 속삭이곤 입술을 뗀다. 마침 주문했던 디저트들이 나와 테이블을 가득히 채우자 웃고 말았다.) 이거야 원, 진수성찬이군.
Eva Kadan:(디저트들로 눈이 즐거워지기 전부터 제 얼굴은 이미 홧홧하게 달아오른 참이었다. 평소처럼 짓궂은 말을 들은 것뿐인데 가슴이 쿵쿵거린다. 네게 들키지 않으려 애써 태연한 척 찻잔을 들고 말을 돌린다.) 아, 여기 라벤더 티 향이 엄청 좋아요. 라벤더의 질이 되게 좋은가 봐요. ...... 그치만 이 디저트들, 다 먹을 수 있을까요?
Richard Moore:남거든 숙소로 보내달라 할 테니 무리하지 마시죠. (여전히 거짓말에 서투르다. 그래도 맞춰 줄 셈으로 다시 말을 높이며 뒤따라 잔을 든다. 달고 새콤한 것들이 눈앞에 잔뜩 있어도 라벤더 향이 가려지지 않는 걸 보면 질이 좋다고 할 수는 있겠군.) 그래도 아가씨가 주신 차가 더 향이 깊었습니다. 포근하고요.
Eva Kadan:정말?...... 정성들여 키운 보람이 있나 봐요. (네 말이 진짜든 아니든 기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홀짝이던 찻잔을 만족스레 내려놓고서, 포크를 들더니 생크림이 장식된 조각케이크의 끄트머리를 잘라 먹었다. 일순 눈이 커지더니 네게도 똑같이 잘라내 포크를 입가에 가져다댄다.) 리처드, 이 케이크 진짜 맛있어요....... 먹어 봐요. 엄청 푹신푹신해.
Richard Moore:…….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부르다. 과거에 이해할 수 없었던 말들이 하나씩 이해가 가는 것도 신기한 경험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열심히 오물거리는 모습을 부드러운 눈길로 보다가, 포크가 제게 오자 잠시 시선이 흩어진다. 조금 정도는 괜찮겠지……. 포크 위에 놓인 조각의 반절 정도만 입에 넣고 천천히 씹는다.) …… 응. 적당히 달고, 푹신하고, 뒤에 남는 맛이 없어 좋군요.
Eva Kadan:(리처드, 디저트를 싫어했던가? 아니, 디저트를 달고 사는 타입은 아니었어도 싫어하지는 않았을 텐데. 아니면 이 케이크가 취향이 아니었나? 식사 후라 배가 부른가? 반절이 남은 포크 위의 조각을 마저 먹으며 여러 가지 의문에 휩싸인다. 기뻐하는 기색도 아니고....... 고개를 기울이며 이번에는 조금 덜 달아 보이는 타르트의 끄트머리를 잘라준다.) 리처드? 이것도 먹어 봐요. 이 가게에서 이게 제일 유명하다고 아까 쓰여 있는 걸 봤어요.
Richard Moore:…… 조금 더 신맛이 있네요. (여전히 짧막한 평을 남기고 눈으로 웃는다. 차를 한 모금 마셔 맛을 씻어내고 네 손에 들린 포크를 빼앗는다.) 오늘 대접을 받아야 할 사람은 당신이래도. (왜 잘 먹지 않느냐 하거든 배부르다고 해야겠지. 방금 먹었던 타르트는 확실히 맛이 좋다. 그러나 마음껏 먹는 건 부담스럽다. 대신 포크로 조각을 크게 잘라 네 입가에 댄다.) 아.
Eva Kadan:....... (네가 내민 조각을 한 입에 냉큼 받아먹으면서도 여전히 신경이 쓰이는 기색을 유지했다. 여태 살면서 입에 대본 디저트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끔 맛있었다. 그럼에도 신경은 온통 네게로 쏠려 있었다. 입을 오물거리다 저도 차를 마신 뒤, 네게 똑바로 눈을 마주한 채 묻는다.) 리처드, 이 가게 별로예요?
Richard Moore:그럴 리가. 오히려 저택에서 먹던 것보다 질이 좋은데. (네 눈길을 느끼면서도 고개를 돌려 다른 디저트를 포크로 뚝뚝 잘라낸다. 위에 크림이 잔뜩 올라가 있어 포크 밑을 손으로 받치고 다시 네 입가로 가져간다.) 차도 맛있고, 뭐.
Eva Kadan:(아까 전과는 확연히 다른 태도가 눈에 밟혔다. 반지를 골라줄 때에도, 꽃을 고를 때에도 이런 느낌은 아니었다. 네 호의를 거절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해 일단 디저트를 받아먹고, 끝이 잘려나간 조각 케이크 접시를 네 앞에 옮겨두었다.) 그럼 이건 당신이 다 드세요. 다른 건 제가 먹을게요. 그러니 이건 당신이 먹어요.
Richard Moore:배가 부른데…… 나중에 먹으면 안 될까?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포크를 내려놓는다. 대신 찻잔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제게 남겨진 케이크 접시를 보았다. 이 상태로 먹는 건 케이크에게도 미안한데.) 아무리 꾸며진 행사라지만 너무 많이 먹어서 이따 탈이 나면 부끄럽잖아.
Eva Kadan:....... (탁 소리가 나게끔 찻잔을 내려놓은 제 낯은 단호한 얼굴이었다.) 거짓말하지 마요. 점심 식사에서 먹는 둥 마는 둥 해놓고. 입맛이 없을 만한 상황이니까 그때는 넘어갔는데....... 제 눈은 언제나 당신에게만 머무르고 있으니까 모를 리가 없잖아요? (그리고는 가벼운 한숨을 쉬고 시선을 돌린다.) ....... 가게가 마음에 안 들거나 맛이 없으면 그냥 그렇게 말해요. ...... 제가 맛있어하니까 억지로 어울려 주고 계시는 거잖아요.
Richard Moore:…… 억지로 어울린 게 아냐. (네가 기분이 상했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어도 천천히 차를 마신다. 거짓말이 아닌 걸 어쩌겠어. 그저 왜 그렇게 되었는지 말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이제 말할 수밖에 없지만서도.) 먹는 양이 줄었어. 그 뿐이야. 무리해서 먹다가 나쁜 꼴을 보이는 것도 싫고. 그게 그렇게 의심스러워, 에바?
Eva Kadan:....... (담담한 태도에 가벼운 한숨을 내쉰다. 이어져 나오는 네 말도 지금 상황으로서는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싫으면 싫다고 말하면 될 텐데. 디저트를 먹지 않는 상황에 화가 난 게 아니다. 거짓말을 들으면서까지 여기에 있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을 뿐이지.) 바보 취급도 적당히 하세요. (그 말을 끝으로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먼저 자리를 떠버린다.)
Richard Moore:바보 취급이라니, 너……. (그 말이 오히려 자신을 바보로 만드는 꼴이란 걸, 생각할 수 없는 거겠지. 순식간에 네가 사라지자 난색을 표하다 직원에게 배달을 부탁한 뒤 네 뒤를 쫓는다.) 에바, 에바! (여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를 해야 납득할까. 그것만은 정말 싫었다.)
Eva Kadan:(네 목소리가 들려오자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늦춘다. 울상이 된 얼굴을 보여 주기가 싫어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곁눈질로 네 쪽을 확인하고서 잠시 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 ....... ....... 이만 돌아갈래요.
Richard Moore:……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어. (네 손목을 잡아 거칠게 돌리자마자 보이는 얼굴에 되려 제 표정이 억장이 무너진 사람처럼 망가진다. 돌아가겠단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그냥, 그냥…… 안 먹다 보니 양이 줄었어. 정말이야.
Eva Kadan:...... 알겠어요. (지금 당장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네가 저를 붙잡는 이 상황도, 그 표정도, 여전히 네 말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해 조금의 원망이 묻어나오는 제 얼굴도 전부 벗어나고 싶었다. 그랬기에 적당한 대답만을 흘리고 네가 붙잡은 제 손목을 끌어당겼다.) ...... 알겠으니까 놔요, 아파요.
Richard Moore:왜 믿질 않아. 난 이 세상에서 너 하나만 믿고 있는데…… (지난 오 년은 네 바람과 달리 끔찍했다. 상상인지 환각인지 모를 목소리와, 네가 없어도 지나가는 시간들과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들. 이제 와서 이 손목을 놓을 리가 없다. 그저 제 얼굴을 다른 손으로 가리고 고개를 떨군다.)
Eva Kadan:....... (머뭇거리며 잡힌 손목과 네 얼굴을 번갈아 바라본다. 조금의 공백 이후 한 발짝 네게 가까이 다가가 얼굴을 가린 네 손 위를 포개어 감싸쥔다. 여전히 울상이 된 얼굴이었지만 조금 전까지의 불신은 지워낸 채였다.) ...... 미안해요. 심하게 말해서.......
Richard Moore:…… 아니야, 사과하지 마. (그 당시에도 몇 번의 사과를 들었는지. 겨우 표정을 갈무리한 뒤 손을 내리고 희미하게 웃었다.) 사과할 사람은 나지. 첫 데이트를 망치고 말았네……. 그래, 이만 돌아가자.
Eva Kadan:...... 아니에요. 나 때문에....... (울 것 같았지만 울지는 않으려고 애썼다. 그랬다가는 아마 저 얼굴이 다시금 괴롭게 변할 것 같아서. 말없이 네 품에 얼굴을 파묻고 힘주어 꼭 안았다.) ...... 당신한테는 늘 미안한 일들만 하네요, 내가. ...... 무리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Richard Moore:무리한 게 아니라…… 네가 내 곁에서 떨어지는 게 싫어. (이런 표현을 사용하면 이상하겠지만, 죽을 만큼 싫다. 머리를 만지면 망가질까 싶어 어깨를 꼭 감싸안고서 속삭인다.) 그러다 화장 다 망가지겠다. 모처럼 예쁘게 꾸몄는데. …… 돌아가기 싫어?
Eva Kadan:...... 그야 돌아가기는 싫죠. 슬슬 효력이 떨어질 때가 돼서 그렇지....... (샐쭉하게 대답하며 순순히 고개를 품에서 떼어내 널 올려다본다. 까치발을 들어 네 턱끝에 작게 입을 맞춘다.) 당신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게요....... 알겠죠? 그러니 안심해요.
Richard Moore:그래. ……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기껏해야 주변을 좀 둘러봤을 뿐인데. 고개를 숙여 입술을 꾹 눌렀다 떼곤 오페라 하우스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현실은 늘 잔인하다. 내게도 이런데, 네게는 오죽할까.) 그럼 출발해야겠군. 천천히 걸어서 가자.
Eva Kadan:네에. (짤막하게 대답하고 네 곁에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며, 슬쩍 손을 내밀었다.) .......
Richard Moore:……. (방금까지 톡 건드리면 울 것 같았으면서 지금은 또 왜 이렇게 귀여운지. 네 손을 깍지를 껴 잡고 최대한 느리게 걷는다.) 해가 지네.
Eva Kadan:늦었다고 혼나도 전 몰라요. (작게 웃음소리를 흘리며 네 보폭에 맞추어 걷는다. 이 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에바와 함께 오페라 하우스에 도착한 무렵부터 두어 시간이 지나고, 완전한 밤이 찾아왔습니다.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들이 이 성대한 결혼식의 피로연이 시작되었음을 알립니다.
이번 피로연의 컨셉은 가장 무도회라 했던가요?
가면을 쓴 사람들, 가면을 쓰지 않은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웃고 떠들며 잔뜩 들뜬 얼굴로 오페라 하우스에 입장합니다.
악단이 음악을 연주하고, 저마다 꾸민 옷차림의 사람들이 춤을 춥니다.
거대한 홀은 완전한 축제 분위기로 꾸며졌습니다.
정숙함은 완벽하게 소거된 이 호화로운 파티 안에서 당신은 1층 홀 계단에 단 한 사람이 내려오는 것을 목도합니다.
맨 얼굴의 에바는 피로연을 위한 연회복 차림으로 한껏 가꾼 채 당신과 시선을 마주합니다.
결혼식의 주인공들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들끼리 떠들던 사람들마저 일제히 두 사람을 주시합니다.
이 무수한 시선에는 감시의 목적이 섞여있음을 압니다.
두 사람의 미래는 불확실합니다. 행복을 위한 결혼도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 그가 당신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잖아요.
Eva Kadan:...... 리처드 공, 당신의 첫 춤을 함께할 영광을 주시겠어요.
어찌 되었든 두 사람이 공식적인 부부가 되는 일은 현재로서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이 빛나는 불빛 사이, 만인의 축복을 가장한 주목 가운데, 황홀한 음악이 울려퍼지고 모두가 결혼을 축하한다 말한다면 꼭, 정말, 부부의 연을 맺게 될 듯한 착각이 들어서…….
아주 지독하게 얽힐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입니다. 저 손을 잡으면.
Richard Moore:기꺼이. (짧막히 대답하며 네 손을 부드럽게 잡아끈다. 제가 입고 있는 새까만 연회복은 눈부신 조명을 받아 빛을 발했지만, 눈앞의 사람에 비하면 어둠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댄스 플로어로 이동해 자연스레 네 허리를 감싸안으며 소곤거린다.) 출 줄 알아?
Eva Kadan:....... (네 손을 잡고서 얌전히 네 곁을 따랐다. 주목을 받는 만큼 더 긴장한 낯빛이 역력했다. 네 질문에 작게 고개를 저으며 걱정을 내비친다.) ...... 으으응, 전혀요....... 오기 전에 어떻게든 연습해 보려고 했는데 역시 잘....... (어떻게 하죠? 작게 덧붙이며 다른 손으로 네 팔을 감싸잡았다.)
이 피로연의 주인공들이 홀로 나가 춤을 추는 건 당연한 일이죠. 타인의 온기가 이토록 뜨겁게 느껴질 일인가 모르겠습니다.
에바와 리처드는 홀 정가운데에서 춤을 추게 됩니다.
Richard Moore:그럼 천천히 출 테니까 따라서 걷기만 해도 돼. (격정적인 음악도 아니니 괜찮겠지. 고개를 숙여 시선을 떼지 않고 느리게 스텝을 옮기며 네 모습을 바라보느라 바쁘다. 주변의 시선이 뭔가. 감시가 뭔가. 어차피 저들에게도 사랑에 빠진 모습이 만족스럽겠지. 붉게 칠한 네 입술에 거리낌없이 입을 맞추며 웃었다.) 드레스가 예쁘군.
Eva Kadan:(네 시선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만큼 실수하지 않으려 온 신경이 곤두세워진 기분이었다. 조심조심 네 스텝에 따라 발을 따라 옮기는 것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입을 맞추면 고개를 들어 그제서야 네 얼굴을 마주하고 뺨이 발그레 물든다.) ...... 부, 부끄럽네요....... 이런 드레스를 입고도 춤을 출 줄 모른다니, 드레스에게 미안할 정도라니까요....... 혹시 제가 실수하더라도 봐주세요. (어리광을 부리듯 작게 칭얼거리며 맞잡은 한 손을 만지작거린다.)
Richard Moore:사교 댄스 대회가 아니니까 긴장 좀 풀어. 내 눈엔 누구보다 사랑스러워. 그거면 충분하지 않나? (이 자리에서 발등에 멍이 들 때까지 밟혀도 좋겠다…… 고 속으로만 생각하며 다시금 입을 맞춘다. 동시에 이 정도도 아직 어렵구나 싶어 한층 더 속도를 늦추며 맞잡은 손을 제 어깨 위로 옮긴다. 어차피 세뇌된 사람들 투성이인데 격식에 흠을 잡는 이도 없을 테지.) 잘만 추는데 뭘.
Eva Kadan:그렇게 말씀하셔도 긴장을 풀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처음인데. (쩔쩔 매는 목소리로 대답하고서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기다, 문득 옅게 웃음을 흘렸다.) 아, 또 이렇게 제 첫 상대를 또 가져가 주는 거네요, 리처드.......
Richard Moore:할 수 있어. 그냥 내 얼굴만 봐, 에바. (춤은 흐름이고, 흐름은 결국 제가 만들면 된다. 양팔 안에 널 가득 안고서 참을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쓴다.) …… 너무 자극하는 말은 하지 마. 견딜 수 없다고.
Eva Kadan:그치만....... (방금 전보다는 어느 정도 긴장이 풀린 듯했지만, 주변을 한 번 힐끔 돌아보고 다시 얼굴을 올려다본다.) 계속 보고 있으면 키스하고 싶어지니까.......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며 뺨을 붉힌다.)
Richard Moore:방금도 했으면서. (아, 그런 키스가 아닌가.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키득거리며 네 입가에 자잘히 입을 맞춘다.) 키스는 밤에 원없이 해 드릴 테니 지금은 이거로 참아 주세요. 아가씨.
Eva Kadan:...... 네, 네에. (부끄러움에 얼굴을 조금 수그렸지만 네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는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만끽하고 싶은 이유에서였다. 이 공간의 모든 사람들이 저희를 보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아니 많이 치사하다고 여겨질 뿐이다. 조금이라도 더 맞닿고 싶은 기분에 다시금 한 손을 떼어낸다.) 역시 손, 잡을래.......
Richard Moore:잡을래? (떨어지는 손을 부드럽게 쥐면, 얇고 가느다란 손이 제 손에 잡아먹히는 듯한 모양새라 잠시 웃음을 삼킨다. 움직임에 익숙해진 티가 나자 조금씩 공간을 넓게 써 발을 놀리며 네 몸을 더 바짝 끌어당긴다.) 손 다음은?
Eva Kadan:앗, ....... (다시금 네 발걸음을 따라 밟으며 맞잡은 손에 힘이 꼭 들어간다. 맞닿아 있는 신체부위들이 뜨겁게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이어지는 네 물음에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다 심각한 얼굴로 고민한다.) 다, 다음? 다음은.......
Richard Moore:(여전히 음악은 느긋했고, 플로어 위를 움직일 때마다 점점 춤을 추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듯도 했지만 느껴지는 시선은 줄어들지 않았다. 지독하구만. 다시 네게로 온 신경을 돌리면 제게 꼭 붙은 가슴이나 배부터 시작해 맞잡은 손까지 열이 오른 것 같아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서 느긋하게 대답을 기다린다.) 응. 다음은 뭘까.
Eva Kadan:....... (그러니까, 손을 잡고, 그 다음에는....... 무슨 정해진 형식이라도 있는 건가? 정답이 따로 있나? 인상을 조금 찌푸리며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다 결국 슬금 네 눈치를 살피며 어깨가 살짝 움츠러들었다.) 제...... 제가 뭔가 실수했나요? 손 잡으면 안 되는 거예요?
Richard Moore:응?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네가 뭘 하고 싶은지 묻는 거야. (등을 짚고 있던 손을 올려 어깨를 다독인다. 귀여워서 정말…… 이걸 어쩌나.) 너무 규칙에 얽매일 필요 없어.
Eva Kadan:미, 미안해요....... 뭔가, 제가 망치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 뿐이라....... (안도의 한숨을 폭 내쉬었다. 하아, 많이 춘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이렇게 피곤해서야, 귀족들은 도대체 왜 그렇게 춤을 좋아하는 걸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긴장한 탓에 빳빳해진 허리가 아릴 지경인데.) ...... 그치만요. 하고 싶은 걸 다 했다가는 여기서 평화롭게 춤 같은 거 못 출 걸요. 후후....... 아, 이, 이런 말 하면 안 되려나. 쉿.......
Richard Moore:(네가 없으면 성립조차 할 수 없는 곳에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어깨부터 허리까지 쭉 훑어내리다 유독 힘이 들어간 허리를 매만져 달래며 얼굴에 의문을 띄운다.) 쉿…… 이 아니라. 뭘 어떻게 하고 싶길래 그래. 궁금해지잖나.
Eva Kadan:글쎄 왜 자꾸 묻는 거예요? 끈질기네, 정말. ...... 당연히 손만이 아니라 그냥....... 저기....... 더, 더 붙어 있고 싶다는 의미일 뿐이에요. ...... 키, 키스하고 싶다고도 말했잖아요?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삐죽였다. 네 표정에 민망함을 느끼며 얼버무리고는 다시금 목소리를 낮춘다.) 쉿 하라구요, 쉿....... 네에?
Richard Moore:나 참……. 어서 파티가 끝나면 좋겠군. (오늘 밤은 꼭 껴안고 잠들 생각 만만이었다. 지금 이렇게 함께 춤을 추는 것도 좋지만, 둘만의 밀어를 속삭이며 보낼 밤이 더 매력적인 건 어쩔 수 없지 않나. 덩달아 목소리를 낮춰 네게만 겨우 들릴 말을 뱉었다.) 나도 키스하고 싶어. 잔뜩.
Eva Kadan:.......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채로 고개를 살그머니 끄덕였다. 이 정도는 다른 이들이 듣더라도 크게 문제될 게 없겠지, 그런 작은 걱정과 함께 다시 조심조심 한 발짝을 더 내디뎠다.)
음악에 맞추어 몸을 움직이면, 이 세상에 두 사람만이 남은 듯한 기분이 듭니다.
아닌 게 아니라 어느새 홀에서 춤을 추는 사람은 단 둘뿐인걸요. 모든 이들이 숨을 죽여 당신들을 구경합니다.
Eva Kadan:...... 저, 이제 조금은 익숙해졌을지도요....... (부담스러운 시선들을 외면하고...... 서투른 스텝인 것은 여전했지만 열심히 널 따라가려 애쓰며 부드러운 얼굴로 속삭인다.) 이제 제법 진짜 귀족같은 느낌처럼 보이나요? 후후.
Richard Moore:누구보다 사랑스러운 귀족 아가씨지. (아직 제 눈엔 새침떼기 메이드 아가씨로 보일 때가 많지만. 갈수록 네 발놀림이 능숙해지자 허리를 잡아당겨 빙글 돌더니 웃으며 이마를 맞댄다. 이끌린 드레스 자락이 팔랑인다.) 침대 위에서 추는 춤은 얼마나 익숙해졌을지 궁금해.
Eva Kadan:저, 저기요. (정말이지, 네 짓궂은 말에는 뺨을 붉히며 장난스레 흘겨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네게 몸을 맡기고 있노라면 저를 향해 있는 무수한 시선들도 아무래도 좋아져 버린다. 그야 당신이 내 눈 앞에 있고 당신의 앞에는 당신과 걸맞는 여자가 되어가는 내가 있으니까. 그렇지 않더라도 당신은 저를 사랑해 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지만 순전한 저의 만족감일 뿐이었다.)
원치 않은 정략 결혼자의 춤을 거절하고, 달밤의 정원 아래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첫 키스를 나누던 그날이 자연스레 떠오릅니다.
세간의 주목을 온몸으로 받고도 우리는 그 누구보다 당당하게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어두운 오페라 하우스의 홀 정가운데, 빛을 받고 있는 이는 두 사람밖에 없습니다.
분명 음악이 흐르는데도 서로의 숨소리가 더 크게 느껴집니다.
에바의 시선은 집요할 만큼 당신에게 고정되어 있습니다.
Eva Kadan:(춤이 마무리되자 안도의 한숨을 폭 내쉬더니, 까치발을 들어 네 입술 위로 짧게 쪽 입을 맞추고 떨어진다.)
에바가 입을 맞춰올 때마다 느껴지던 정신이 개운해지는 감각이 이번에는 들지 않습니다.
일종의 보호막이 덧입혀지는 듯한 안정적인 감각도, 들지 않습니다.
이건 그 어떤 이유나 명목이 붙은 입맞춤이 아닙니다.
에바의 눈동자 아래에 깔린 지독한 열망. 그곳에서 파생된.
정중히 당신에게 인사를 한 뒤,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에바가 가문원들의 부름에 이끌려 그 틈으로 사라집니다.
홀에서는 새 음악이 흘러나오며 다른 사람들이 다시금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홀 내에 구비된 음료와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Richard Moore:(마치 신기루 같군. 음식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주변을 둘러본다. 별 게 없으면 테라스로 향한다. 온몸이 아주 뜨끈뜨끈하다.)
마침 테라스에 있던 게스트 한 명이 당신에게 아는 체를 합니다.
이번 결혼식에 초대된 리처드 집안의 친척입니다.
Richard Moore:…… 예. 오랜만이군요. (가볍게 목례한다.)
친척: (간단한 안부를 나누고 멀리에 있는 에바 쪽을 바라본다.) 저 자가 당신에게 큰 호감을 표하고 있다지요? 당신의 정략 결혼 상대 말입니다.
Richard Moore:(아. 그런 상황이었지. 상대를 따라 네가 있는 곳을 보며 웃었다.) 그렇습니다만……. 다행히도 제가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친척: 그런데도 결혼식을 성사시키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가끔 보인다는 유언비어가 돌더군요. 관리는 좀 해두셔야겠습니다. 최초 발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죠....... 알려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Richard Moore:말 그대로 유언비어겠지요. 걱정 마십시오. 본래 가문과 가문이 만나면 온갖 질투의 말들이 돌기 마련이잖습니까. 그래도, 알려주셔서 감사하군요.
친척: 동의합니다. 그래도 뭐, 걱정할 게 있겠습니까? 이 성대한 피로연도, 어제의 공연도, 3일간의 결혼식 축하 기간도 모두 에바 씨 쪽에서 계획했다던데요.
규모를 보세요. 돈을 대체 얼마나 쓴 걸까요?
Richard Moore:아무래도 왕가와 연이 닿으니 체면을 차리고 싶었던 거겠죠. 확실히 과한 면이 있지만서도 좋게 대접해주니 잘 받을 수밖에요.
친척: 결혼식을 위한 웨딩복도 보셨습니까? 주문 제작을 했다는데 아주...... 어마어마해요.
Richard Moore:예복은 아직 못 봤는데…… 흐음. 이거, 제가 초라해보이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물론 결혼식에서 가장 빛나야 할 사람은 신부라지만 마냥 부족해보일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안 그래요?
친척: 괜찮을 겁니다. 너무 염려는 마세요. 뭐, 아직 못 보셨다면 기대해도 좋을 것 같군요. 이 오페라 하우스, 성대한 파티들, 공연에 결혼식에 주문 제작까지.......
단 한 사람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다니. 이유는 단 세 개뿐이죠. 사랑이거나, 제대로 미쳤거나, 혹은 둘 다거나.
Richard Moore:사랑에 미쳤다면 이보다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그의 말에 개의치 않으며 태연하게 웃기만 했다.) 받은 것보다 많이 돌려주면 되지요.
친척: 모쪼록 소문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축하의 말씀은 내일 다시 한 번 드리도록 하지요.
그렇게 말한 친척은 테라스에서 자리를 뜹니다.
그래요. 오페라 하우스에 올 때부터 느낀 그 집요한 시선입니다.
시선이 느껴지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면 구석진 자리 어둠이 내리깔린 곳에서, 누군가 눈을 형형히 빛내며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Richard Moore:(뭐야? 눈이 마주치자 인상을 쓰더니 시선이 느껴지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그 대상도 대뜸 리처드에게 가까이 다가옵니다.
당신의 손목을 자국이 남을 만큼 강하게 쥐고 속삭이는 목소리는 기이할 정도로 빨랐고 모독적인 주문처럼 느껴질 지경이었습니다.
?: 나와 함께 지하 동굴로 가자. 나의 거래자가 되어라. 나의 강림을 맞이할 새로운 아이호트의 숙주가 되어라!
Richard Moore:뭔 개소리야?! 그놈의 거래자가 뭔데? 종이겠지! (의문의 인물의 얼굴을 후려갈긴다.)
?: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지만 맞은 얼굴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일어나 중얼거렸다.) 아, 그 빌어먹을 것이 내 눈에서 빠져나가려, 도망치려 하고 있어.
그 빌어먹을 것이 너를 내게서 빼내려 하고 있어.
무슨 수작을 부린 거지?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거야?
소용 없다, 소용 없어!
눈을 희번뜩 뜨며 무어라 속삭이던 가문원은 곧 인형처럼 그 자리에 정지해 있다가, 삐걱거리며 걸음을 옮깁니다.
Richard Moore:
SAN Roll
기준치: |
54/27/10 |
굴림: |
8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남의 여자를 왜 멋대로 부르는 거야. 빌어먹을 것이라니. 언어 수준도 알아 줘야겠군. 욕을 중얼거리며 가문원의 뒤를 쫓는다.)
그의 뒷모습을 따라 걸음을 옮기는 그 즉시, 사방에서 시선이 꽂힙니다.
어둠 속에 표정을 감춘 에바의 가문원들입니다. 일제히 당신을 응시합니다.
Richard Moore:
SAN Roll
기준치: |
54/27/10 |
굴림: |
47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리처드는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가문원을 당당하게 따라갑니다. 시선이 거두어집니다.
가문원은 한 복도로 이어지는 코너를 돌아갑니다.
Richard Moore:(어디까지 가는 거야. 쫓아가는 와중에도 뭔가 없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코너를 돌 때쯤 그만 발을 삐끗해 넘어져 버리고 맙니다.
가문원은 그 사이에 어디로 증발했는지 흔적도 보이지 않습니다.
Richard Moore:젠장……. (바닥에 주저앉은 채 발목을 감싸쥔다. 어디로 간 거야. 망할 자식.)
그러다 문득, 리처드의 시야에 복도 카펫 아래에 무언가 떨어져 깔려 있음을 발견합니다.
Richard Moore:? (카펫 밑에 손을 넣어 더듬는다.)
Richard Moore:……. (일단 쪽지를 주머니에 넣고 일어난다. 걸을 수 있나?)
Richard Moore:진짜 빌어먹을 새끼네?! (허공에 욕을 하며 무작정 걸음을 옮긴다. 아무리 이상한 놈이 얽혀 있어도 방금 본 놈은 사람이니 어쩌면 찾을 수 있겠지.)
복도를 돌고 돌아도...... 가문원의 흔적은 보이지 않네요. 하필 인적이 드문 곳이라 목격자를 찾기도 힘들어 보입니다.
욱신거리는 발목의 통증을 느끼다보면, 리처드는 발목이 부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휴게실에 들어간 사람은 없는 듯하니 발목이 아프다면 그곳에서 쉬는 것도 괜찮겠습니다.
Richard Moore:(지금 쉴 때가 아닌데……. 그래도 에바를 찾는 게 좋겠어. 발목의 통증이 거슬려 인상을 잔뜩 쓴 채 휴게실로 향한다.)
휴게실은 텅 비어 있습니다. 한 구석에서는 잔잔한 음악이 틀어진 상태입니다. 푹신한 소파와 티 테이블, 턴 테이블이 눈에 들어옵니다.
Richard Moore:하필 이럴 때 아무도 없나. (사용인조차 안 보이다니. 턴테이블이 있는 쪽으로 가 휘적거린다. 음악을 끄고 싶다!)
LP판이 돌아가는 턴 테이블입니다. 리처드는 음악을 끕니다.
Richard Moore:
관찰력
기준치: |
65/32/13 |
굴림: |
14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동화책에서 찢겨져 나온 듯한 종이가 턴 테이블 아래에 깔린 것을 발견합니다.
Richard Moore:뭘 자꾸 까는데. (종이를 꺼낸다.)
[ ...... 계획은 마냥 완벽하진 못했습니다. 여전히 마녀의 마법으로 인해 망각에 사로잡힌 이와, 세뇌에 사로잡힌 이들이 남아 있었으니까요. 도망쳐도 그들을 쫓아올 사람들이. 때문에 ■은 마녀의 세뇌를 벗어날 주문을 외우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오래오래 영원히 ■■■■■■. ]
Richard Moore:……? (기분 나빠. 종잇조각을 들고 소파에 앉으려다가 혹시 몰라 소파도 탈탈 털어본다.)
리처드는 소파 틈새에 끼어 있는 종이 쪽지를 발견합니다.
Richard Moore:하나만 해라……. (이번 쪽지는 몇 번 접은 거지?)
접혀 있지 않습니다. 누군가 급하게 휘갈긴 듯한 쪽지입니다.
Richard Moore:(그럼…… 본다. 급하게.)
Richard Moore:……. (역시 그 공연……. 소파에 앉아 종이들을 내려놓고 주머니 속에 넣었던 쪽지도 확인한다.)
종이 쪽지에 적힌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핸드아웃이 공개됩니다.
Richard Moore:
지능
기준치: |
65/32/13 |
굴림: |
15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세뇌 주문은 리처드를 아는 집안 전체에 걸려 있다 했었죠. 그들의 세뇌를 모두 풀기에 하나 하나 찾아가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혼식 당일에는요? 모두가 모여 있는 결혼식장에서 이 주문을 사용한다면……?
Richard Moore:(새삼스럽다. 종이 쪼가리들을 잘 모아 주머니에 다시 쑤셔넣고 티 테이블을 살펴본다.)
티 테이블 위에는 다 마신 찻잔과 티포트가 놓여 있습니다. 옆에는 누군가 읽다 만 동화책이 존재합니다.
Richard Moore:(다 마셨으면 치우든지. 이 동화책이 방금 그건가 싶어 손에 들고서 테이블 위로 다리를 쭉 펼쳐 걸친다. 그대로 슬렁슬렁 동화를 읽어본다.)
[그들은 숲에서 죽음을 맞이했지만, 마녀의 마법으로 다시 살아나 죽기 전 과거로 돌아갔습니다. 과거의 삶은 조금 기묘했지만요. 존재하지 않던 것이 생겨나고, 두 사람을 둘러싼 환경에도 변화가 드러났습니다. 마녀가 현실을 미약하게 조작한 것입니다.]
두 사람 중 한 쪽을 망각하는 이들도 생겨났습니다. 이 또한 마녀의 짓이었습니다. 마녀는 그들의 기억을 지우고 일부는 세뇌시켜 자신 대신 그들을 감시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는, 죽기 전 얻었던 지식을 사용해 두 사람을 보호할 마법을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이 마법이 중첩되어 완전히 마녀의 시선에서 벗어났을 때 ■를 데리고 도망칠 계획을 세웠습니다. ]
Richard Moore:그 망할 놈 말고 우리를 돕는 신이라도 있는 건지, 원. (내용이 내용인지라 마냥 달갑지는 않다. 동화책을 허벅지 위에 내려놓고 고개를 뒤로 젖혀 소파에 완전히 기댄 뒤 눈을 감는다. 어차피 숙소에 올라갈 사람은 한 명 뿐이니 이러고 있다 보면 오겠지.)
리처드가 누워 있다 보면 휴게실 문이 벌컥 열립니다.
황급히 문을 닫고 당신에게 다가오는 이는 에바입니다.
Richard Moore:아, 왔나. (눈을 뜨고 고개만 돌린다.)
Eva Kadan:늦었죠, 미안해요....... 아까 당신이 복도로 쫓아나가는 걸 봤는데, 좀처럼 빠져나오질 못 해서....... (안도하며 네 곁에 걸터앉았다.) 괜찮아요? 다친 곳은 없어요?
Richard Moore:응. 괜찮아. 그런데 그 놈이 금방 도망치는 바람에……. (천천히 다리를 내리고 동화책을 손에 들며 네 몸을 무릎 위에 앉힌다.)
Eva Kadan:앗, ....... (뺨을 붉히며 네 어깨를 꼭 잡았다.) 이, 이러다 누가 오겠어요. 안 그래도 조금 있으면 분명 저를 찾아다닐 걸요.......
Richard Moore:어차피 곧 쉴 시간 아니야? (정말이지 집요한 작자들이군. 품에 안긴 네게 동화책과 쪽지들을 건넨다.) 일단 이거부터 봐.
Eva Kadan:뭘 이렇게 한가득....... 이게 뭐예요? (우선 동화책을 펼쳐보다 한두 페이지의 내용을 읽고 네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생각이 바뀌었는지 금세 네 품에서 빠져나와 네가 건넨 것들을 돌려주고, 일어서서 속삭인다.) ...... 리처드, 저희....... 방에 가서 마저 이야기해요.
Richard Moore:여기저기에 널려 있었어. 주문은 아까 쫓아가다 찾은 거고. (동화책 커버 안쪽에 쪽지를 끼운 뒤 손에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먼저 올라가. 난 누가 있나 좀 보고 따라갈게.
Eva Kadan:안 돼요! (꼭 어린애를 혼내는 듯한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네 손을 잡아 끌더니 손바닥에 글씨를 쓰고 의기양양하게 바라본다.)
그런 정보를 자꾸 바깥으로 낼래요? 게다가 지금 제가 보호해야 할 건 당신이거든요? 빨리 올라가요. 지금. 당장.
Richard Moore:아니……. (꾸중을 들은 어린아이처럼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뒤통수만 긁는다. 뭔데. 이 박력. 누군 보호해야 할 사람이 없는 줄 아나. …… 서운하군. 네 손을 놓고 먼저 계단을 오른다. 절뚝거리면 아웃이다. 최대한 신경을 쓰며 발을 딛었다.)
Eva Kadan:흥. (그런 네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말은 나중에나 하기로 한다. 널 뒤따라 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눈에 띄게 퉁퉁 부어오른 발목이 바짓단 밑으로 조금씩 시야에 들어왔다. 그곳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아무 말도 않고 얌전히 뒤를 따라간다.) 제 방으로 가요.
Richard Moore:(자신을 지키는 일에 열심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조금씩 제게 흠집을 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걸 고스란히 느끼고 있는 내가 우습기도 하고……. 줄곧 속을 전혀 몰라주는 점도 역시, 서운하지 않다 할 수 없겠지. 네 방 앞에 서서 입을 꾹 다문 채 기다린다.)
Eva Kadan:들어와요. (제 방문을 열고 안으로 먼저 들어가 네가 들어오길 기다렸다.) 그리고 아직 이상한 말도 하면 안 돼요...... 알겠죠?
Richard Moore:(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 잠근다. 잠깐 머무른다 해도 남의 방인지라 시선을 어디 둘 지 몰라 손에 들고 있는 동화책만 바라본다.)
Eva Kadan:..... 되게 남의 방에 오신 것처럼....... (왜 저러시지? 힐끔 네 쪽을 보고서는 잠시 욕실에 들어가 선반을 뒤지며 네게 들리게끔 말했다.) 아무튼 거기 침대에 앉아 계세요. 금방 나갈게요.
Richard Moore:뭐……. (남의 방이 맞다고 하면 토라지겠지. 침대를 흘긋 보곤 바닥에 앉아 침대에 등을 기대고 가져온 것들을 다시 한 번 훑는다. 할 일 자체는 어렵지 않은데, 그전에 아까 자신이 겪은 것과 같은 일이 네게 또 벌어지면 어쩌나 싶어 점차 표정이 심각해진다.)
Eva Kadan:침대에 앉아 계시라고 했죠. (볼일을 끝마치고 나온 제 손에는 조금은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수건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는 저도 바닥에 앉아 물끄러미 네 얼굴을 바라본다.) 저한테 뭐 하실 말씀 없어요?
Richard Moore:(시종일관 험악한 표정으로 앉아있다 네가 다가오자 눈을 마주친다. 바로 네 손목부터 잡아 살피며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태 험한 일 당한 적 있어? 없어? (과거의 어느 순간이 머릿속에서 겹쳐져 이를 꽉 깨문다.)
Eva Kadan:네? (질문을 한 건 저였는데 오히려 네가 무섭게 물어보자 말문이 막힌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고개를 기울인다.) ...... 저, 적어도 이번에는 없는 것 같은데요....... 왜, 왜 그래요?
Richard Moore:자고 일어났는데 몸이 이상하게 아프다던가, 육체적인 게 아니어도 뭔가 찝찝한 일이 있었다던가 하는 건? (묻는 목소리가 점점 떨리기 시작해 작게 숨을 고른다. 나름 제물로 삼고 있으니 손찌검은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빌어먹을 것이니 뭐니 하는 걸 보면 전혀 아니었다. 나는 재회하고 나서도 무용했다. 네 애정을 받을 가치는 있었던 걸까. 생각이 멋대로 뻗쳐나가자 다시금 열을 식히려 제 머리칼을 마구 헤집었다.)
Eva Kadan:리처드......? (조금은 겁을 먹은 듯한 눈으로 네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역시 아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Richard Moore:…… 괜찮아. 놀라게 해서 미안해. (쥐고 있던 손목을 놓고 조심스레 네 어깨를 감싸 품에 안았다.) 나 정말 글러먹은 놈이네…….
Eva Kadan:(시무룩해진 얼굴을 하고서 걱정이 묻어나오는 손길로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몰라도 저는 한 번도 당신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네? 모처럼 둘만 있게 됐는데 그런 얼굴 할 거예요?
Richard Moore:……. (겉으로만 화려하게 꾸미고 돌보면 무슨 소용인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하면 이해야 하겠지만 상처가 되지 않으리라 장담은 불가능하다. 네 걱정스런 목소리에도 할 말을 찾지 못 해 눈을 감았다. 빨리 내일이 와야 할 텐데. 그래야, 이 망할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텐데.)
Eva Kadan:...... 하아. 리처드. (걱정스러운 한숨을 내쉬고 네 품에서 고개를 돌려 네 뺨을 쿡 찔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를 안 해주는 건 괜찮아요. 그치만 괜찮지 않았으면서 괜찮다고 대답하는 건 싫어요. 자, 이만 얼른 침대에 앉아요. 착하죠, 네? (달래듯 웃음을 지어 보이며 찔렀던 그 뺨을 살살 어루만져 주었다.)
Richard Moore:(네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아니, 감히 빗댈 수 없겠지. 쓰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 앉는다. 자꾸만 과거의 기억이 시야에 덧씌워져 괴로워진다.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아서 더 괴로웠다. 나는 괜찮다. 실질적으로 제게 문제가 생긴 것도 없었다. 그저 누가 마음을 칼로 저미는 듯한 게, 그게, 견디기 힘들었다.) …… 괜찮다고 했잖아.
Eva Kadan:(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따뜻한 수건을 잠시 제 무릎 위에 두고, 살그머니 네 신발을 벗겨낸다. 빨갛게 부어오른 발목을 조심스레 쓸어내리며 고개를 들었다.) ...... 괜찮다구요? 정말?
Richard Moore:그래. 금방 가라앉겠지. (단순히 발목을 접질린 게 전부다. 정말로, 너는 나밖에 안 보이는구나. 그래서 내 생각은 전혀 알 수 없는 걸까. 조용히 그런 눈길만을 보내다 시선을 돌린다.)
Eva Kadan:.......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저도 더 이상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않기로 했다. 네 발을 감싸잡고 따뜻한 수건으로 발목과 발등을 몇 번이고 쓸어내렸다. 담담한 얼굴이 되어 규칙적으로 손을 움직이는 것 말고는 침묵을 유지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모르겠다. 네가 저를 아끼고 사랑해 준다는 것 외에는 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으니까. 차라리 끈질기게 캐묻고 추궁할 수 있을 정도로 뻔뻔한 성격이었다면 괜찮았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툭툭 내뱉는 네 말이 오늘따라 사무치게 쓸쓸했다.)
Richard Moore:…… 그쯤 하면 충분해. (이제 그렇게 제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았으면 했다. 간호라고 해도, 아직은 어쩔 수 없는 쓰라림이 남은 모양이다. 한숨을 쉬고 몸을 숙여 네 손에서 수건을 내려놓는다. 내일 일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되겠지. 원래 머리가 좋으니까, 그걸 읽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다 이해했을 터다. 방금 전처럼 안기라는 듯 제 허벅지를 톡톡 두들기며 입을 연다.) 안고 싶어.
Eva Kadan:...... 아직 안 돼요. 저도 안고 있고 싶지만....... 발목이 이런 상태면 내일 어떻게 하려고....... 잔뜩 뛰어야 할지도 모르는데. (조금만 더요, 그렇게 덧붙이고는 다시 수건을 주워들었다. 얼굴은 들지 않았다.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낯이 금세 울상이 될 것만 같아서였다.) ...... 제가 눈치채지 못 했으면 내일까지 계속 숨길 생각이었던 거죠.......
Richard Moore:살짝 삐끗한 게 전부야. 자고 일어나면 멀쩡할걸. (조금 뛴다 해서 무슨 문제가 있겠나. 다친 발목보단 여태 마구 휘저어졌을 네 마음이 더 걱정스러워서 네 어깨를 강하게 쥐었다.) 나를 너무 못 믿네. 에바. 지금 필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제발. 응?
Eva Kadan:....... (마지못해 아직 열기가 남은 수건을 내려놓았다. 제 무릎 위의 부어오른 발목을 가만히 응시하다 이내 고개를 살짝 숙여 발등에 입을 맞췄다. 입을 맞추고 나서야 어깨의 손을 겹쳐 떨어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의 애틋함이 묻어나오는 얼굴이었다.) ...... 이제 이걸로 됐어요. 오늘 밤은 괜찮아요. ....... 그러니까....... 이제 돌아가셔도 돼요.
Richard Moore:……. (답답하다. 말할 수 없는 자신도, 돌아가라고 하는 너도. 해봤자 우울에 뛰어들 뿐인 이야기 말고 해야 할 말들이 아직도 그렇게 많은데 모든 일이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하는 수 없이 이번엔 네 손을 잡아 제게로 끌어당긴다.) 그게 네 진심이야?
Eva Kadan:(주춤거리면서도 손이 끌어당기는 대로 네 무릎 위에 다시금 탈싹 앉았다. 눈치를 살피다가도 결국 시선을 내리깔았다.) ...... 네. .......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 이런 이야기. 마음이 답답해지니까.......
Richard Moore:하……. (어떻게 해야 정말 별 것도 아니었다는 걸 알까. 적당히 이야기하는 수밖에 없나. 비로소 품에 들어온 네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 같이 가자는 말을 들었어. 네가 나쁜 사람인 것처럼 말하길래 주먹을 한 방 먹였는데, 소용이 없더라고……. 어떻게 홀린 건지 몰라도 힘이 제법 세길래…… 음. 너한테 손찌검이라도 했으면 어쩌나 생각하니까 눈앞이 희게 변해서. …… 그래서.
Eva Kadan:....... (잠자코 네 말을 듣고 있다 네가 입을 다문 후에도 말이 없었다. 그러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네 얼굴을 본다.) ...... 그런 이유로? ...... 그러면 그냥 처음부터....... 막상 무슨 일을 당하고 온 건 전부 당신이면서 나한테는 괜찮다고 하고, 마음껏 간호도 못 하게 하고.......
Richard Moore:내겐 대단치 않은 일이지만 네겐 아니니까. (네 손발목은 나도 부러뜨릴 수 있어. 한숨을 쉬며 말을 덧대곤 네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항상, 항상 이렇게 품에 둘 수 있다면 좋겠다.) 이렇게 있는 것도 간호야.
Eva Kadan:하아……. (들으라는 듯이 저도 똑같이 깊게 한숨을 내쉬면서도 네 뒷목을 살살 어루만진다.) 우리 도련님은 언제쯤 고집을 꺾는 방법을 배워 오실까요……. 그러면 제가 당신 발목 같은 건 신경도 안 썼으면 좋겠어요? 아니면서. 애초에 제가 아니면 누가 돌봐 주냐구요. 누구한테 걱정 받으실 거예요, 네에?
Richard Moore:내가 잘못했어. (모르는 척을 부탁하면 염치 없는 놈이 되겠지. 네 등 뒤로 슬그머니 소맷자락을 올려 손목을 확인한다. 이쪽도 붓긴 부었군. 고개를 들어 네 뺨에 입을 맞춘다.) 지금은 이게 좋아. 욕심부리고 싶어. 걸을 수도 있고 많이 아프지도 않으니까, 에바.
Eva Kadan:알겠어요....... (여전히 납득은 가지 않았지만 잘못했다고 하는 말에 이쯤 끝맺기로 한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가만히 뒷목을 끌어안으며 입가에 두어 번 입을 맞췄다.) 말 나온 김에 하나 더 물어 봐도 돼요? .......
Richard Moore:(네 기분이 조금씩이나마 풀려가는 듯해 얼굴 여기저기를 손끝으로 쓰다듬는다.) 뭘 묻고 싶길래 그렇게 뜸을 들여. 뭔데?
Eva Kadan:(여전히 뜸을 들이며 네 시선을 힐끔힐끔 살피기만 했다. 물어본다고 해서 정말로 솔직한 답변을 들을 수 있을지조차 잘 모르겠지만.) 아까 바깥에 나갔을 때 있죠, 저한테 먹는 양이 줄어든 것뿐이라고 이야기하셨잖아요. 그거……. …… 저 때문이에요?
Richard Moore:…… 으음…….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다. 적당히 잊어버렸을 줄 알았는데. 동시에 이게 이만큼 눈치를 볼 일인가 싶기도 해서 소리 없이 웃었다.) 널 위해서라고 하는 게 맞을까. 하찮아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살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 알다시피 내가 좀…… 받아들이는 게 느릴 때가 있잖아.
Eva Kadan:……. (네 웃는 낯에도 걱정스러운 눈길은 거두지 않았다. 괜스레 네 셔츠의 깃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느리게 깜빡인다.) …… 전혀 하찮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 제가 죽고 나서 얼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당신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인걸…….
Richard Moore:네가 날 지키기 위해 겪어야 했던 그 모든 일에 비하면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로. 함께 있으니 그간의 일은 아무래도 좋을 만큼 아득하게 느껴진다. 홀로 지낸 동안 바라던 건 단 한 가지였으니 당연하겠지. 네 이마와 눈가, 입술에 다시금 입을 맞추며 낮게 말을 이었다.) …… 오 년. 짧지?
Eva Kadan:네? 오, 오 년이요? (일이 년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상치 못한 답변을 들어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와 버린다. 금방 대답하기를 주저하다 어떤 말을 골라도 바람직한 답변은 되지 못할 것 같아 그저 잠시 입을 다물었다.) …… 제가 죽은 뒤 당신이 잘 지낼 거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고, 그럼에도 살아가 주길 바란 것도 사실이지만……. …… 그래도 상상할 수가 없어요. 당신이 어떤 마음으로 그 세월을 살아갔을지…….
Richard Moore:응. 그렇게 오 년이 몇 년까지 이어졌을지 알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군. (지나친 호기심은 때로 독을 마시는 결과를 불러온다. 그래서 가능한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이제 이 사람 앞에선 그마저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나라고 해서 바람직한 생각만 하진 않았지. 가끔은 내가 괴로운 게 네게도 기쁨이 되지 않을까 여겼어. 크게 달라진 건 없었고. 언제나 네 생각을 했거든.
Eva Kadan:……. (어깨에 고개를 기댄 채 네게 안겨 있는 몸의 힘을 뺀다. 이러니 제가 사라지던 때의 순간도 자연히 떠오른다.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기만 하던 그때.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지만, 어찌 됐든 그 시간을 홀로 보냈을 네 생각을 하면 싫어도 울상이 되어 버린다. 한 손을 들어 메마른 네 뺨을 살살 어루만져 주었다.) …… 많이 외로웠죠…….
Richard Moore:…… 지금 여기에, 이렇게 있잖아. 살아 숨쉬는 네가 날 보고 있잖아. (다시는 잃지 않으리라.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숙여 네 가슴팍에 귀를 대면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린다. 숨을 쉰다. 꿈이 아니기만 하면 된다.) 응, 조금은……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Eva Kadan:정말? 조금이에요? (의미 없는 질문을 되묻고서 그런 네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 마음이 아프지만, 그랬지만 네 말처럼 실재하는 서로의 지금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그랬기에 옅은 미소를 띠며 쓰다듬는 손길을 계속했다.) 우리 도련님, 장하네요……. 잘 버텨 줬어요. 덕분에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거예요, 당신의 그 시간도, 저의 시간들도…… 전부 헛되지 않았어.
Richard Moore:정말……. (그런 거라면 좋겠다. 그저 네 체취를 한없이 들이마시고 내뱉으면서, 몇 번이고 현실 여부를 확인한다. 끝이 없어 보이던 구덩이 속에 내던져진 채 떨어지기만 하다 보면 극적으로 이끌려 올라간다 한들 기억은 날카로운 편린이 되어 남는다.)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네…….
Eva Kadan:……. (반복적으로 움직이던 손끝이 잘게 떨렸다. 네게 그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아 이만 손을 거두고 주먹을 꼭 쥐었다. 제가 모르는 네 시간이다. 제 목숨과 맞바꾼 만큼 마치 벌처럼 다가오는 미지의 영역이, 그런 네게 마냥 저라는 존재 하나로 길고 긴 후유증을 지워낼 자신이 없었다.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어쩌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막연히 기대를 품었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다시금 쓸쓸한 얼굴이 되어 네 품에서 떨어져 바닥에 발을 디디며 화제를 돌렸다.) …… 아, 저, 이제 슬슬 이 옷도 갈아입고 싶고, …… 이만 진짜로 돌아가셔도 괜찮으니까요…….
Richard Moore:…… 곁에 있으면 안 될까? 가만히 잠만 잘게. (아. 지금 또한 과거와 닮았다. 오 년을 보내도 제자리걸음에 불과했단 말인가. 내게 가장 중요한 건 너라고, 나의 사랑은 너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하면, 믿을까. 사실 내가 더 너를 필요로 했는데. 고개를 숙이고 허전한 무릎을 만지다 자리에서 일어난다.) …… 없었던 말로 생각해도 돼. 잘 자.
Eva Kadan:……. (지금의 저로서는 네 곁에 있어야 할 것이 자신이어도 괜찮을지에 대한 걱정이 일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존재를 생각하는 건 아니다. 그저 자신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영원한 질문의 반복이었다. 늘 당신을 슬프게 만드는 건 오랜 세월 동안 나였잖아요.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을 삼키고 네 뒤에서 서성인다.) …… 저도, …… 이제 조금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건 마찬가지예요.
Richard Moore:…… 있지. (어쩐지 목이 메인다. 역시 가문원에게 당한 일이 정신적으로 버거웠나. 멀쩡한 미소를 지을 수 있길 바라며 뒤를 돌았다.) 사랑해. 한 점의 변함도 없이 사랑하고 있어. (네가 없는 세상은 나만 알았으면 해. 떨리는 손으로 네 손을 꼭 쥐었다가 놓는다.)
Eva Kadan:(제 손을 잡았다가 떨어져 나가는 네 손을 놓치기 싫어 무의식적으로 다시금 덥석 붙잡았다. 이 손을 놓치면 안될 것 같아서. 그 순간 제 안의 기저에서 맴돌고 있던 감정이 불안이었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려 네 시선을 마주했다. 평생 동안 시선의 끝에 닿아있던 익숙한 얼굴이다.) ……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던 순간이 없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 사랑해요……. 많이, 엄청 많이 사랑해요.
Richard Moore:(네가 내게 보여준 것들에 비하면 자신은 아주 작고 너덜너덜했다. 방금 귓가로 들려온 고백이 그 사실을 선명하게도 드러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다. 이렇게 서로를 보고 있는데 왜 항상 너는 저 먼 곳을 달려가고 있을까. 아니면 그것이야말로 착각일까. 너에겐 선택할 권리가 있다. 있고도 남았다.) …… 이런 나라도 괜찮다면 평생 널 위해 헌신할게. 나를 모조리 녹여야 한다 해도, …… 행복할 거야. 앞으로도 사랑하게 해 주겠어? 내 전부를 주고 싶어. 다른 사람은 싫어.
Eva Kadan:…… 정말요? ……. (자신이 없는 말투로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간다. 네 손끝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 정말 행복할 것 같아요? 저랑 있어도……. 내가 늘 당신을 괴롭게 만드는 걸까 봐, 숨통을 조여매고 있을까 봐 걱정이 돼요. 언젠가 저라는 존재가 당신한테 짐짝이 되는 것도 무섭고, …… 그래서……. …… 미안해요, 이런 이야기만 잔뜩 해서……. 당신도 많이 힘들었을 텐데.
Richard Moore:행복한 일이든 괴로운 일이든 네가 아닌 미래는 상상할 수 없어. 오직 너만이, 살아가는 이유가 된 게 언제인지 모르겠거든. (결국 서로 같은 고민을 안고 있었겠지. 기껏 온몸을 바쳐 살리고 떠난 뒤, 그 사람이 한심해 보여 떠난다면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아니야. …… 전부, 내가 들어야 할 이야기고, 받아들여야 할 이야기지. 너라면 날 죽여도 좋아. 예전처럼 등 뒤를 맡기는 것보다 항상 눈에 보여야 목을 조르기 쉽겠지. 그 모든 것들을 사랑해. 네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그보다 큰 애정까지 모든 것들을.
Eva Kadan:……. (이내 네 몸을 꼭 끌어안으며 품에 얼굴을 묻었다.) 역시 떨어지고 싶지 않아요. 욕심내고 싶어요……. 같이 있고 싶어. 당신을 마음껏 사랑하고, 당신한테 더 사랑받고 싶어……. 당신이 아니라면 제게 더 이상 존재 의의조차 없어요. 당신이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어요, 저는……. 그러니까 저야말로 당신 곁에 있는 걸 허락해 주세요. 지금처럼, 지금보다 더…… 사랑하게 해 주세요. 리처드.
Richard Moore:…… 응, 사랑해. 세상의 끝이 오면 그럼에도 아직 더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어. 너는 그만큼 사랑스럽고 눈부셔. (품에 안긴 네 등을 우는 아이를 달래듯 다정히 쓸어내린다. 이게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 뒤늦은 열애에도 시간은 오고 꽃은 끝없이 피어날 것이다.) 사랑해 줘. 더 큰 사랑을 줄게.
Eva Kadan:…… 응. 사랑할게요……. 앞으로도. (이 순간만큼은 자격 같은 걸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저도 똑같이 네 등을 토닥여 주었다.) 제 두 번째 삶이 주어진 이유는 당신 하나 때문일 거예요. …… 예전에는 운명이라는 게 참 얄궂다고만 생각했는데, 죽기 직전까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말이죠, ……. 적어도 지금은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아요……. 운명을 꺾다 못해 이렇게 우리 손에 다시 쥐어졌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절대 떨어지지 마요, 약속이에요. 계속해서 저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아 줘야 돼요.
Richard Moore:신인지 뭔지 사정 챙겨 줄 필요 없지. 그렇게 우리를 가지고 놀았으니 우리도 한 방 날려야 하지 않겠어. 여길 빠져나가고, …… 보란 듯이 행복하게 살자. 또 어떤 시련이 닥치더라도 떨어지지 말자. (어떻게든 네 흔들리는 마음을 단단히 쌓을 수 있었기를. 네 빈 손을 끌어와 손바닥 위로 깊게 입을 맞춘다.) 네 모든 시작과 끝에…… 끝과 시작에 함께 설 거야. 약속해.
Eva Kadan:(입을 맞춘 부근이 불에 덴 듯 뜨겁게만 느껴진다. 꼭 애정이라는 말을 처음 배운 것처럼 생소하면서도 크게 와닿는 감각이 신기했다. 손에서부터 퍼진 열기는 얼굴에까지 올라온 채 한 발짝 물러난다.) …… 같이 있고 싶어요……. 그러니까, …… 오늘 밤에는 같이 자요.
Richard Moore:…… 그러자. (네 붉어진 얼굴을 보니 제 온몸에도 열이 퍼져나간다. 갑작스레 이 모든 상황이 부끄러워져 조심히 손을 놓고서 시선을 이리저리 옮긴다.) 그, 음, 그러니까, 옷 갈아입고 올게.
Eva Kadan:네, 네에. (괜히 허둥지둥 문을 열어주며 민망한 티를 냈지만 네게서 시선을 거두지는 않았다. 줄곧 따라가는 눈을 유지한 채 손을 꼼질거렸다.) …… 빨리 오셔야 해요. 안 오면 안 돼.
Richard Moore:금방 올 테니까. (손잡이를 잡은 채 상체만 숙여 쪽, 입을 맞추고 제 방으로 돌아간다. 정신이 없군……. 팔다리가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는 채 옷을 갈아입고 다시 네 방으로 향한다.)
Eva Kadan:(네가 돌아간 사이에 저도 서둘러 옷을 갈아입으려 준비해 준 잠옷을 꺼냈다. 드레스를 벗으려 했지만 급한 마음이 더해져 좀처럼 혼자서 쉽게 벗기가 어려웠다. 서투르게나마 옷을 벗고 정리를 하는데 금세 네가 돌아와 화들짝 놀란다. 입지 못한 잠옷을 쥐고 서둘러 뛰어가 들어오지 못 하게끔 문 손잡이를 붙잡았다.) 자, 잠깐만요! 들어오지 마세요. 죄송해요. 아직 덜 갈아입어서……. 빠, 빨리 오라고 말씀드려놓고 면목이 없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오 분 안에 끝낼게요.
Richard Moore:어……. …… 혹시 혼자 갈아입기 힘들어? (늘 날래게 일을 마치던 너다. 그런 네가 허둥거리는 기색이 보여 문 손잡이를 쥔 채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쥐었다, 놓았다. 쥐었다, 놓았다.) 기다릴게. 그래도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Eva Kadan:이, 이제 괜찮아요. 무사히 벗었으니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문 건너편에서 중얼거리고서는 부끄러움에 눈을 질끈 감았다 뜬다. 네가 못 봐서 다행이라고는 생각하지만 서투른 모습을 들킨 것만으로도 충분히 부끄러웠기에 얼굴이 빨개진 채 주섬주섬 잠옷을 걸쳐 입었다. 쌀쌀할 법도 한데 짧은 시간 안에 난리를 피워서인지 꽤 더워 보이는 얼굴로 슬그머니 문을 열어준다.) 미, 미안해요. 기다리게 만들어서.
Richard Moore: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열린 문 사이로 들어가 서서 네 얼굴을 살펴본다. 뭔지 몰라도 대단한 사투가 있었나 보다. 새빨간 뺨을 손끝으로 스치듯 쓰다듬고서 먼저 침대 위로 올라간다.) 자기 전에 열부터 식혀야겠어. 이리 와.
Eva Kadan:……. (여전히 어쩔 줄을 모르는 얼굴이었다. 흐트러진 머리까지 뒤늦게 풀어내리고 나서야 머뭇머뭇 널 따라 침대 위로 올라갔다.) ……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네요. 속으로 비웃으시면 안 돼요…….
Richard Moore:안 웃었어. 귀엽긴 하군. (네가 침대 위로 올라오자마자 품으로 끌어당겨 안고서 그대로 옆으로 털썩 눕는다. 열이야 알아서 식는 거 아닌가. 품에 들어온 네 얼굴을 계속, 계속 어루만진다.)
Eva Kadan:…… 저기……. (네 품에 안긴 채 얌전히 그 손길을 받고 있노라면 얼굴의 열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시선이 이리저리 방황하며 눈치를 살폈다.) …… 이, 이러시면 열을 식힐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Richard Moore:그럼 대신 미뤘던 키스로 할까. (어차피 손부채질을 하더라도 이 열기가 잦아들 것 같지 않았다. 손끝이 깎아내린 듯한 콧날을 타고 흘러내렸다가, 입술 위를 천천히 누른다.)
Eva Kadan:앗, …… 응. (얼굴에 네 손길이 닿으면 저도 모르게 눈을 꼭 감았다. 어쩌지, 얼굴의 체온은 더 높아지는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키스를 하고 싶었던 마음은 마찬가지였기에 그대로 눈을 감고 네게 얼굴을 바짝 가까이한다.) …… 잔뜩 하고 싶어요. 키스…….
Richard Moore:……. (역시 너무나도 사랑스럽다. 가까이 다가온 채 감긴 눈꺼풀도 엄지로 쓸어보더니, 천천히 입술을 맞댄다. 춤을 추며 나눈 가벼운 키스와 달리 처음부터 진득히 시작한 입맞춤은 금세 네 입술이 촉촉하게 젖을 만큼 집요하고 부드러웠다. 쪽쪽 입술 닿는 소리와 숨이 새는 소리가 소리의 전부였다.)
Eva Kadan:(잊고 있었던 감각이 온 몸을 휘감싼다. 첫 키스를 나눌 때와 똑같은 설렘을 안고서 서투르게나마 네 입술을 오물거린다. 이제 처음만큼 숨을 참지 않아도 조금씩 숨을 내뱉는 방법을 알 것 같았다. 키스라는 건 하면 할수록 애가 타는 기분이어서, 네 몸을 끌어안은 손이 네 허리와 옆구리를 살살 쓰다듬기도 했다.) 응, 리처드…….
Richard Moore:괜찮아. 착하지……. (숨을 삼키는 사이 다정하게 속삭이며 눈꼬리를 내려 웃는다. 자연히 뺨을 감싸쥐고 어루만지던 손으로 살짝 힘을 주어 누르면 입술이 벌어져서, 조금 더 깊게 물고 한층 소리를 흘린다. 그러다 네 간지러운 손길에 점차 머릿속도 허리도 저릿저릿해져 혀를 밀어넣는다. 뜨겁게 달아오른 입 안쪽 구석구석을 훑고 다니다 혀를 맞대 최대한 천천히 부볐다. 스칠 때마다 애간장이 닳는 기분에 웃고 있던 표정도 어느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Eva Kadan:아, 으응……. (혀가 맞닿아 뒤얽히면 금세 모든 신경이 풀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간지러워. 가슴 한 구석이 간지럽다. 혀를 어색하게 핥아올리면 기다렸다는 듯 엉켜오는 네 혀가 제 몸마저 달아오르게 만든다. 쓰다듬는 손길을 계속하며 호흡이 턱끝까지 차오를 무렵에 입술을 떼고서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응, 하아……. …… 기분, 좋아요…….
Richard Moore:응, 기분 좋네. 키스……. (떨어진 입술이 아쉬워 네 아랫입술을 계속해서 깊게 물었다 놓으면서도 마주친 눈동자에선 애정이 흘러넘친다. 달아오른 귓가를 조금 힘을 줘 문지르듯 만지며 다시금 입술을 꾹 눌렀다 뗀다.) …… 조금만, 더, 하지 않을래? …….
Eva Kadan:…… 응. …… 더, 더 하고 싶어요. (네 물음에 망설임도 없이 홀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떨어져 있던 만큼, 참았던 만큼 더 마음껏 붙어 있고 싶었다. 간지럽다는 듯 어깨를 살짝 움츠리다, 이내 제가 먼저 도로 눈을 감고 혀끝으로 네 입술을 톡 건드렸다. 그리고는 입술을 조금 벌린 채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다시 마구 숨을 뒤섞기 시작한다.)
Richard Moore:(대답 대신 눈만 깜박이곤 먼저 다가가려던 찰나, 네가 먼저 움직이자 순간 몸이 굳었다. 배우는 게 너무 빠르면 이렇게 되는군. 더 감상을 늘어놓을 새도 없이 입을 벌린 채 난잡히 혀를 뒤얽었다. 한없이 달콤하다. 게다가 색정적이다. 끝을 모르고 싶어. 의식적으로 몸을 살짝 떼어 거리를 두고서 네 혀 밑으로 파고들어 쓸어올리곤 쪽쪽대는 것보다 더, 진득한 소리가 날 만큼 삼킨다.) 하아…….
Eva Kadan:핫, 으응, ……. (중간중간 벅차오른 숨을 겨우 내쉬며 키스를 이어나갔다. 이미 닿아있음에도 더 닿고 싶고, 더 욕심내고 싶었다. 적나라한 소리가 실내를 가득 메우면 새삼 너와 혀를 뒤섞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되어 더 간지럽다. 입술이 잠시 떨어졌을 때 애가 타는 듯한 얼굴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 너무 야해요……. 하아, …… 야한 키스, 엊그제부터 줄곧 하고 싶었어요…….
Richard Moore:그건……. (어떻게 사람이 고작 몇 마디의 말로 다른 사람을 미치게 할 수 있지. 너를 곁에 두고 여태 수도 없이 느낀 감탄은 오늘도 새롭게 깃발을 꽂고 있었다.) 야한 키스, …… 응, 나도, …… 하고 싶었어. (말을 하기 위해 잠시 떨어지는 순간조차 아쉬워 곧잘 입술을 깨물고 빨아들이느라 말이 길게 늘어진다. 혀를 내밀어 입가를 간지럽히듯 핥으며 모든 걸 억누르는 듯한 표정으로 속삭임을 잇는다.) 전부 만지고 싶은데 말이지……. 정말.
Eva Kadan:……. (네가 속삭이는 말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첫날밤의 기억이 떠올라 버린다. 그 속내를 들키지도 않았는데 응큼한 여자로 보일 것만 같아 괜히 뜨끔해서는 시선을 피했다.) …… 부끄러워요, 그런 말……. (똑같이 나직하게 속삭이고서는 새삼 수줍게 입술에 짧은 입맞춤을 몇 번이고 남겼다.) 좋아해요, 리처드……. 이대로 매일 밤마다 함께하고 싶어요.
Richard Moore:매일 밤이 돌아올 때마다…… 아니, 밤이든 낮이든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 내 전부를 쏟아부을 준비가 됐어. (일부러 장난스러운 투로 밀어를 흘려넣으며 네 허리를 꼬옥 안는다.) 내일부턴 아무런 걱정 없이 잠들 수 있을 거야. 계속 지켜 줄게.
Eva Kadan:…….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서는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입술을 우물거리기만 했다. 맞닿은 신체가 괜히 신경이 쓰인다.) 정말요? 이제 저도 마음 놓고 당신한테서 보호받아 볼 수 있는 건가요? 후후, 농담이에요. …… 저도 쭉, 리처드 당신을 지켜줄 거예요. (그리고 한 번 더 입을 맞추고 떨어진다.)
Richard Moore:자꾸 유혹하는 말만 하지 마. 필사적으로 참고 있다고. (사실 무슨 말을 해도 야릇하게 들릴 지경이다. 손끝으로 척추를 따라 천천히 훑고 내려가다 다시 올라가 어깨도 감싸안고 답하듯 쪽 입을 맞춘다.) 한동안 날 지키는 것보다 새신부 생활에 집중해주면 좋겠는데. 네가 있어야 나도 힘이 나거든.
Eva Kadan:제, 제가 뭘요……. 참는 건 저도 마찬가지라구요. (어리광처럼 투덜거리며 척추를 훑는 간질거리는 손길에 네 몸을 꾹 쥐었다.) …… 응, 그럴 거예요. 이제 우리를 방해할 것들이 아무것도 없다면요……. 이제, 저기, …… 진짜 아내가 된 기분을 만끽해 보고 싶달까……. 데이트도 더 하고, 그, …… 밤마다 야한 키스도 잔뜩…… 하고……. 그러고 싶어요.
Richard Moore:딱 하루만 더 참자. (정말 만져도 된다면 끝도 없이 만질 수 있을 텐데. 아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네 얼굴을 바라본다.) 으응. 여기저기 데이트도 하러 가고, 에바가 좋아하는 야한 키스도 잔뜩 하고. 아기 만들기도 노력해야겠네. 며칠 정도 침대에서 못 나가게 만들어 버릴까. 그럼 무조건 생기겠지.
Eva Kadan:…… 벼, 변태. (말이 길어질수록 점점 얼굴에 열이 올라 짧게 뱉었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기억들이 다시 머릿속에 피어오르자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 그대로 품에 폭 파묻혀 버린다.) …… 그때 하던 게, 너무 좋았어서 이따금 자꾸 생각나요. 당신 때문이에요……. 절조 없는 여자라고 생각하셔도 당신 탓이니까요.
Richard Moore:앞으로 점점 더 좋아지면 어쩌려고 그래. (보이는 게 머리밖에 없어 웃으며 머리 위로도 마구 입을 맞춘다.) 나는 또 어쩐담. 절조 없는 아내도 좋고 부끄러움 많은 아내도 좋고 음탕한 아내도 좋은데. 야한 키스 한 번에 섹스 한 번을 하면 아내가 만족할까?
Eva Kadan:그, 그러니까 그렇게 노골적인 말……. (네 말처럼 앞으로 더 좋아지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잠깐 상상하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린다.) …… 내일 밤에는, 키스도, 그, 그것도…… 많이 해 주세요. 한 번만 말고, …… 잔뜩 채워 주셔야 돼요……. (스스로도 내뱉는 말을 자각하지 못하는 채로 말하다 퍼뜩 널 꼭 끌어안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저, 대, 대답하지 마세요! 부끄러우니까……!
Richard Moore:입술부터 발가락 끝까지 전부 키스해야지. ……! (무어라 말을 더 하려는데 네게 말려들어 뚝 끊긴다. 내가 언제는 하지 말란다고 안 하는 도련님이었나. 일부러 네 턱을 들어올리고 다시 입술을 겹쳐 네 조그만 입속에 침이 가득 고일 때까지 괴롭히더니, 묘한 미소를 지었다.) …… 난 분명 말은 안 했다? 흐음. 이제 슬 자야겠군. (웃음기를 머금은 채 딴청을 피우며 이불을 바짝 끌어당겼다.)
Eva Kadan:(입술이 겹쳐지면 속절없이 네 입맞춤에 이끌려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저 짓궂은 미소가 평소처럼 야속했지만, 그 얼굴만큼 안심되는 것도 없었다. 한층 풀어진 얼굴을 하고서 네가 잘 준비를 하는 걸 지켜보다 이불 속으로 다시 몸을 꼭 붙였다. 이불은 포근했고 네 몸은 따뜻하다.) …… 잘 거예요?
Richard Moore:으응. 조금이라도 일찍 자야 내일이 빨리 오잖나. 일 초라도 빨리 여기서 나가고 싶어. (네 몸을 마주 꼭 안고서 등을 천천히 토닥인다. 이렇게 제대로 안고 자는 것도 처음인가. 저번엔 아무래도 둘 다 제정신이 아니었고……. 작게 하품을 하곤 입가에 도장을 꾹 찍는다.) 잘 자. 내 사랑하는 부인.
Eva Kadan:…… 응, 알겠어요. 푹 주무실 수 있길 바랄게요. (네 품에 얼굴을 부비며 입꼬리를 올렸다. 내일부터는 이런 일상이 지속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만이 저를 지탱해 준다. 네 허리를 끌어안고 저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잘 자요, …… 오늘도 사랑해요.
눈을 뜨면 내일은 두 사람의 결혼식 날일 테죠.
무엇을 위한 결혼식인지는 정말 아무도 알지 못하나, 적어도 웨딩 로드의 곁에 서 있는 이는 당신과 에바일 테고…….
그 끝에 존재하는 건 완벽한 행복이 되지 못하리란 사실을 압니다.
창밖으로부터 파도 소리가 들립니다. 차가운 바다는 가져올 봄을 안고, 절벽 위에 핀 꽃들은 달빛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어두운 방 안에서의 당신을 바라보던 그 눈빛은 무엇을 위한 맹목을 띠는지를 압니다.
그래요. 에바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해서 미쳤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 만큼.
이만한 맹목에는 세 가지 이유밖에 없으니까. 사랑이거나, 미쳤거나, 혹은 둘 다거나…….
일찍부터 당신과 에바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분주했습니다.
당신을 향유로 씻기고 몸단장을 해주는 사용인들은 예식복을 가지고 옵니다. 장인의 손에 손수 주문 제작되었다는 예식복은 과연 아름다움의 극치를 달립니다.
가족들은 연달아 당신의 방을 방문해 결혼을 축하한다 말하고, 인사를 합니다.
어제 성대한 피로연이 열렸던 오페라 하우스의 1층 홀은 어느새 결혼식이 진행될 식장으로 장식되었습니다.
대기실이 된 휴게실에서 사용인들의 돌봄을 받으며 앉아 있으면 저도 모르게 심장 박동 소리가 귓가에 울립니다. 쿵, 쿵, 하고.
이 결혼식이 끝나면…… 당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사용인들이 휴게실을 나가고 나면 문득 숙소로 이어지는 계단을 통해 누군가 내려옵니다.
Eva Kadan:아, 리처드....... (드레스를 차려입고 한껏 치장된 모습이었다.) ...... 미안해요. 식이 시작되기 전까지 만나면 안 되는 게 원칙이라고 했지만, 역시 다시 한 번 계획을 맞춰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Richard Moore:…… 아. (계단을 내려오는 네 모습을 보는 순간부터 벌어진 입이 좀처럼 다물어질 생각을 않았다. 물론 제 차림도 남부럽지 않게 꾸며진 상태였지만, 네 웨딩드레스 차림을 보고 있자니 혼이 쏙 빠질 것 같아 겨우 고개를 끄덕인다.) 식이 시작되면 모든 사람들이 모일 테니까, 우리도 입장을 마치고 나면 내가 주문을 외울게. 그리고 도망치는 거야.
Eva Kadan:...... 응. 알겠어요. 조심해야 해요....... (가까이 다가와 걱정스레 네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떨어진다.) 식의 도중에 제가 신호를 보낼게요, 알겠죠? …… 발목은 괜찮아요? 뛸 수 있겠어요?
Richard Moore:너야말로 조심해. (고개를 틀어 네 입술에도 입맞춤을 돌려준다.) 문제 없어. 널 안고서 뛸 수도 있다고.
Eva Kadan:정말이죠? 알겠어요……. 믿을게요. 저기, 그리고……. (과연 지금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건지 이어지는 말을 망설이며 머뭇거린다.) …… 지금의 리처드, 엄청 멋있어요. …… 또 한 번 반했어.
Richard Moore:…… 크흠. (언제 말을 꺼낼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네가 선수를 치자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누군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우면서……. (민망함에 헛기침을 몇 번 더 하더니 일부러 농담을 건넨다.) 벗기는 건 오늘밤에 전부 즐길 수 있겠네, 예비 신부님.
Eva Kadan:…… 이, 이런 때에…… 변태 신랑.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채 누가 들어오기 전에 종종걸음으로 휴게실의 문 손잡이를 잡았다.) 그럼 이따 봐요, 리처드…….
문을 나서며 에바가 마지막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시선이 짧게 와닿고, 곧 스쳐지나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들러리가 들어와 곧 웨딩 로드를 걸어야 한다 속삭입니다.
축복과 환희와, 행복이 가득해야 할 결혼식…….
당신과 에바의 결혼식입니다. 홀로 나가 볼까요, 리처드?
Richard Moore:하아……. (아무리 전부 쇼라고 해도 긴장된다.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만진 뒤 휴게실을 나서 홀 안으로 걸어나간다.)
그렇게 웨딩 로드를 먼저 한 발자국 밟으면, 그곳에는 무수히 많은 시선이 존재했습니다.
Richard Moore:
관찰력
기준치: |
65/32/13 |
굴림: |
84 |
판정결과: |
실패 |
끄트머리에 앉아 있는 에바의 가문원들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모두 당신을 잡아먹을 듯이 응시하고 있습니다.
허공으로 꽃잎이 휘날립니다. 활짝 웃는 시동들이 당신의 앞길에 꽃잎을 수놓습니다.
계획이 틀어진다면, 탈출에 실패한다면 당신은 이곳이 아닌 전혀 다른 장소로 이끌릴 게 분명합니다.
그리고, 웨딩 로드의 끝에서 당신 다음으로 걸어나오는 에바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죽음에서 돌아온 우리. 지독한 위기에 여러 번 처하고 마는 우리.
오로지 당신만이 필요했다는 절절한 편지를 기억하나요?
평범한 결혼식의 절차에 따라 준비된 반지를 보면, 어제 에바와 함께 골랐던 반지가 있습니다. 에바가 준비해 둔 걸까요?
Richard Moore:(반지와 네 얼굴을 몰래 쳐다보곤 당돌함에 헛웃음이 나오려고 한다. 주례사를 들으며 반지 교환식 차례가 올 때까지 꼿꼿하게 서서 기다린다.)
Eva Kadan:(함께 고른 부케와 함께 고른 반지가 있으니 어쩐지 정말로 둘만의 결혼식처럼 느껴진다. 잠깐이라면 이 착각을 즐겨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로. 반지 교환의 차례가 오면 얼굴을 발그레하게 붉히며 제 왼손을 네게 건넨다.)
Richard Moore:……. (이 욕심쟁이는, 귀여워서 뭐든 봐주고 싶어지는 게 문제다. 반지 중 작은 반지를 들어 네 왼손 약지에 끼운다. 꼭 맞아 떨어지는 반지가 자기 자리를 찾은 것 같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이어 제 손도 네게 내밀었다.)
Eva Kadan:(어제처럼 긴장하지 말아야지, 실수해서 반지를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마음으로 몇 번을 다짐하고서 다행히 아무런 실수 없이 매끄럽게 네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줄 수 있었다. 네게만 들릴 작은 웃음 소리를 흘렸다.)
그가 당신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고, 당신도 그의 손에 반지를 끼워줍니다.
주례의 내용은 사실 하나도 들리지 않습니다. 에바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형식상의 같은 질문이 당신에게도 주어집니다.
에바가 당신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주례사의 목소리가 울려퍼집니다.
이 시간부로 리처드 무어와 에바 카단은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Richard Moore:데이지, 바다, 폭풍. 데이지! 바다! 폭풍! (세뇌당했다지만 참 고맙군, 주례 할아범. 장내가 쩌렁쩌렁하도록 고함을 지르고 네 손을 꽉 붙잡았다.)
그리하여 직후에 일어난 일은 이 모든 장내를 뒤집어버릴 사건이었습니다.
주례사의 문장이 끝나기 무섭게 당신은 에바를 이끌고 웨딩 로드를 달립니다.
허공에 부케가 흩날리고 방금까지 웃던 하객들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표정을 짓습니다.
맞잡은 에바 손은 단단합니다.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이.
일련의 장면이 슬로우 모션처럼 펼쳐지는 듯한 기분입니다.
당신을 잡으려, 그 존재에게 당신과 에바를 바치려 움직이던 그들은 당신이 주문을 외우기 무섭게 행동을 멈춥니다.
또한 에바를 잊고 있던 리처드의 집안 사람들마저도 일제히 꿈에서 깨어난 표정을 짓는 것을 발견합니다.
두 사람은 멈추지 않고 절벽을 거쳐 달립니다.
시간은 환한 대낮, 작열하는 태양빛을 등에 이고 당신은 그와 함께 들판을 가로질렀습니다.
절벽 위에 핀 히스 꽃과 들풀이 바람에 휘날리고 꽃내음이 코끝을 지배합니다.
절벽 아래로 내려와 해안가를 지나면 파도가 발치에서 넘실댑니다.
뒤를 돌아보면 에바의 나부끼는 머리카락이 시야에 잡힙니다.
이 기이한 현실, 이 기이한 고통, 이 기이한 헌신, 이 기이한…… 기이한 환희.
Eva Kadan:리처드…….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자 뒤를 돌아보면 무수한 자연의 광경만이 펼쳐져 있었다. 맞잡은 손을 끌어당기고는 발걸음을 늦추며 숨을 고른다.)
Richard Moore:…… 에바. (네게 이끌려 뜀박질을 멈춘다. 손목과 발목의 거슬리는 통증만이 현실 감각을 일깨운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 그러나 아무 말도 더하지 않고 네 몸을 품에 가득 끌어안는다.)
Eva Kadan:리처드....... (다시 한 번 네 이름을 부르며 널 마주 끌어안았다. 후련함과 애틋함, 그리고 미안함과 고마움까지 여러 감정이 뒤섞인 미소만을 흘려냈다.) 리처드, 우리가 만약 또다시 그들에게 쫓기게 되더라도…… 저랑 같이 도망칠 수 있어요?
Richard Moore:너만 있다면 수천 번이라도 도망칠 수 있어. (대답을 하는 그 잠깐 사이 눈가가 젖어든다. 드디어 되찾았다. 드디어 온전한 너를 내 품으로 데려왔다. 인간은 늘 신에게 저항한다. 그를 생각하면 우리의 도망은 우리가 지극히 인간다운 존재임을 증명했다. 미소가 어린 네 입가에 입을 맞춘다.) 사랑해.
Eva Kadan:…… 리처드, 사랑해요……. (네 뒷목을 끌어안고 눈썹을 늘어뜨린 채 눈시울을 마주했다. 어쩌다 우리였던 건지, 운명을 원망하던 때는 이제 지나갔다. 당신과 함께가 될 수 있다면 이와 같은 짓을 몇 번이고 되풀이할 수 있다는 확신마저 있었다.) …… 이번에야말로, 제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해 주세요. 이제는 어디로도 가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당신이…… 평생 떨어지지 말아달라는 소리예요.
Richard Moore:이 여행의 끝을 함께 보자. 그리고 웃으면서 새로운 여행을 떠나자. (심장이 마구 고동친다.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한다.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졌다 해도 이의가 없다. 오히려 달갑다.) 언제나 손 뻗으면 닿는 곳에서 널 바라볼 거야. 언제나 고개를 숙이면 입술이 닿는 거리에서 사랑을 속삭이겠지.
Eva Kadan:…… 당신만 있다면, 당신만 있다면…… 저는 그 무엇도 필요하지 않을 거예요. 아무것도 욕심나지 않을 거예요. (여태까지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절로 붉어진 눈으로 환하게 웃었다. 앞으로도 제 모든 처음이자 마지막은 당신일 것이다.) ……
나는 네가 필요했으니까. 나는 너만 필요했으니까…….
죽음을 넘어 육지에 온 우리들은 아득한 수평선을 바라봅니다.
그 끝에 당신이 원하던 형태의 영원이 있기를 바랄까요.
그날 밤 세간에는 본인들의 결혼식장에서 도망친 두 연인의 이야기가 1면에 실렸습니다.
일말의 소동이 있었으나 곧 약간의 해프닝이자 이벤트로 무마된 이 특별한 결혼식은,
에바 가족들의 ‘마치 누군가에게 세뇌당하고 있는 듯한 감각이었다’는 발언과,
리처드의 가문원들의 ‘에바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라는 발언을 토대로 불가사의한 사건으로 분류되었습니다.
히스 꽃이 가득 피어있는 정원, 달이 밝게 비추는 밤에 나가면...
그곳에는 에바가 깨끗한 낯으로 당신을 맞이하며 웃고 있습니다.
지나간 모든 일들을 망각하는 일은 결코 허락되지 못할 테지만 리처드와 에바는 맹세하였습니다.
우연 또는 자연의 무상한 이치로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때때로 시들지만,
죽음조차 그대가 자신의 그림자 속에서 헤매인다고 자랑치 못 하리다
불멸의 시구 속에서 당신은 시간과 하나가 되는도다
인간이 살아숨쉬고 두 눈이 볼 수 있는 동안,
이 시가 존재하는 한 당신은 영원히 살아있을 거예요.
END 4. In the middle of eternal
두 사람은 완전히 자유의 몸으로 다시금 생을 살아갑니다.